지난 23일 오후 대구시 동구 장등로 대구 사회복지공동모금회로 한 남성이 전화를 걸어왔다. "근처 식당에 있으니 잠깐 나와서 돈 받아 가이소." 전화를 받은 김미정(38) 모금사업팀장은 그가 매년 익명으로 1억원 이상을 기부해 온 '산타 키다리 아저씨'임을 직감했다.
식당에서 김 팀장을 만난 60대 초반의 이 남성은 봉투 하나를 건넸다. 봉투 안에는 1억2200여만원짜리 수표 한 장과 광고 전단 뒷면에 '꼭 필요한 곳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고 쓴 메모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키다리 아저씨는 "올해는 사정이 좋지 않아 이웃을 돕기 위해 적금을 하고 있는 나눔 통장을 해지해 돈을 마련했다"며 "정부 지원이 미치지 못하는 소외된 이웃에게 쓰일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가 대구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를 시작한 것은 2012년 1월이다. 그때 모금회 사무실로 찾아가 처음으로 1억원을 냈고, 같은 해 12월에도 사무실 근처 국밥집에서 1억2300여만원을 전달했다. 2013년과 지난해 12월에도 각각 1억2400여만원과 1억2500만원을 기부했다. 올해 낸 금액까지 합하면 전체 기부 액수는 5억9600여만원에 이른다.
첫 기부 때를 빼고는 매년 크리스마스이브나 이브 전날에 기부해 공동모금회는 그를 '산타 키다리 아저씨'로 부른다. 올해도 신원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했다. 박용훈 대구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처장은 "소중한 성금이 소외된 이웃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얼굴 없는 기부 천사'는 전국 각지에서 만날 수 있다. 부산 동구 초량6동 주민센터에는 지난 23일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10㎏짜리 쌀 100포대가 배달돼 왔다. 감만1동과 수영동 주민센터에도 각각 10㎏짜리 쌀 50포대씩이 들어왔다. 주민센터 3곳에 쌀과 함께 배달된 종이쪽지에는 '빈자일등(貧者一燈·가난한 사람이 밝히는 등불 하나)'이라는 사자성어 아래에 '어려운 학생들을 우선으로 사용해 주세요'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지난 18일에는 경남 김해시청 시민복지과에 허름한 옷차림의 노부부가 찾아와 1000만원이 든 봉투를 전달했다. 작년 말에도 3000만원을 전했던 이 노부부는 "올해는 경기가 좋지 않아 기부 금액이 작년보다 적다"며 미안해했다고 한다. 광주광역시 동구에도 최근 익명 기부자 2명으로부터 20㎏짜리 쌀 100포대와 50포대가 전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