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재난 대책을 총괄하는 사령탑인 국민안전처가 내년 3월 세종시 이전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다. 이전 시점이 불과 3개월 앞으로 다가왔지만, 237억원에 이르는 이사비(이전 비용)가 내년 정부 예산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9월 국민안전처와 인사혁신처를 세종시로 이전하는 계획을 확정했다. 두 부처는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신설한 기관이다. 그러나 정부는 정작 안전처의 세종시 이전에 필요한 예산을 2016년 예산안에 넣지 않았다. 국가 대사(大事)를 졸속으로 처리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안전처는 이전에 200억원 넘는 돈이 드는 이유로 위성통신·영상 장비 등 고가 장비를 갖춘 중앙재난안전상황실과 소방본부 상황실, 해경본부 상황실 등을 세종시 청사 내에 새로 설치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회 등에선 "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 남짓한 세종시 청사에 굳이 새로 상황실을 지어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안전처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나 국회 참석차 장관이 서울에 머무를 일이 많아 기존 상황실도 예비용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산 대책 없이 "일단 옮겨라"
정부와 여당은 올 3월부터 국민안전처 세종시 이전 문제를 논의했지만 주관 부서인 행정자치부가 본격 작업에 들어간 것은 지난 8월부터다. 정부는 9월 23일 공청회를 열었고, 10월 16일엔 안전처와 인사혁신처를 내년 3월에 세종시로 옮긴다는 정부 고시(告示)를 냈다. 불과 2달여 만에 속전속결로 이전 계획을 확정한 셈이다.
이 과정에서 이전에 필요한 예산은 내년 예산안에 반영하지 못했다. 정부 예산안이 이미 9월 11일에 국회에 제출된 데다, 행자부도 이전만 서둘렀을 뿐 예산 확보에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내년 총선 한 달 전인 2016년 3월로 세종시 이전 시점을 잡은 것은 결국 충청권 표를 의식한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
박인용 안전처 장관은 10월 23일 국회 안전행정위 전체회의에서 새누리당 정용기 의원(대전 대덕)의 질의에 답을 하는 방식으로 국회에 이전 비용 필요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정부 부처가 이전하는데 예산안에 반영이 안 돼 괄호 넣기로 증액 심사를 요청하는 게 맞느냐"(새정치민주연합 박남춘 의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국회는 인천·충청권 의원으로 갈려 찬반 논쟁
국회는 지난 10월 말 안행위 전체회의와 예산심사소위 등에서 이전 예산 증액 문제를 논의했지만 결론을 못 냈다. 충청권 의원들은 예산 증액에 찬성했지만, 인천 지역 의원들은 인천에 있는 안전처 산하 해경본부가 세종시로 옮겨가는 것에 거세게 반발했다. 해경을 바다가 아닌 내륙(內陸)으로 옮기는 게 잘못됐다는 주장이었다. 새누리당 홍일표 의원(인천 남구 갑) 등 인천 지역 국회의원 13명은 "안전처를 세종시로 이전하는 것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에 위배된다"며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도 냈다. 특별법 제정 당시 안전행정부는 세종시 이전 대상에서 제외됐는데, 안행부에서 떨어져 나온 안전처를 그대로 보내는 것은 법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국가적 재난관리를 위한 재난안전 총괄부서인 국민안전처는…]
[대한민국의 중앙행정기관 인사혁신처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인천과 충청권 의원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리자 국회 안행위 예산심사소위는 지난달 초 찬반 의견을 첨부해 안전처 이전 예산안을 국회 예결위로 보냈다. 그러나 예결위는 이 문제를 거의 논의하지 않았고, 내년 예산에도 반영하지 않았다.
그러자 국민안전처는 기획재정부에 예비비로 이전 비용을 충당하게 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예비비는 국무회의 통과 등 정부 내 절차만 거치면 국회 심의 없이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기재부는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국회에서 예산을 전액 삭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다방면으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가 재난 상황실 중복 건설 논란
김동현 안전처 기획조정실장은 서울과 세종시에 재난상황실을 둬야 하는 이유로 "장관이 서울에 있을 때 재난 상황이 터지면 지휘를 하기 위해 예비 시설을 두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상당수 전문가들은 안전처의 세종시 이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론을 제기한다. 멀지 않은 거리에 200억원 넘는 예산을 들여 두 개의 상황실을 둬야 하는 것을 국민들이 납득하겠느냐는 것이다. 조원철 연세대 명예교수는 "지금 있는 멀쩡한 시설을 놔두고 예산을 들여 세종시로 옮긴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라며 "본래 목적인 재난 대응 업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시설·장비 등을 제대로 활용할 방안을 고민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안전처는 재난상황실을 새로 짓는 데 필요한 예산이 확보되지 않으면 일단 일반 행정부서들만 내년 3월까지 세종시로 옮겨간다는 구상이다. 재난상황실 운영 인력을 비롯한 상황 대응 부서는 추가로 예산을 확보해 내년 8월쯤 옮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로까지 넘어가 있는 이 문제가 안전처 구상대로 풀릴 가능성은 크지 않다. 전문가들은 "안전처가 국민 안전의 중추 역할을 하기는커녕 서울과 세종시에서 두 집 살림을 하면서 제 앞가림도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