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 지방의회 선거가 치러진 12일 한 여성이 수도 리야드에 있는 한 여성 전용 투표소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집어넣고 있다. 사우디 정부는 이날 건국 이후 83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올해 95세인 나엘라 무함마드 살리 나셰프 할머니는 지난 12일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있는 한 여성 전용 투표소를 찾았다. 온몸을 검은 천으로 감싸고 휠체어에 의지한 채 투표함에 다가간 그는 투표용지를 집어넣은 뒤 무사히 큰일을 치러낸 사람처럼 깊은 심호흡을 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은 "가족이 아닌 남성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조차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약 1세기를 살아온 할머니는 방금 자신이 한 행동이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사우디에서 지방의회 의원을 뽑는 선거가 치러진 12일은 이 나라 여성들에게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이날 사우디 여성들은 건국 이래 83년 만에 처음으로 투표권을 얻어 행사했다. 사상 처음으로 여성 정치인도 탄생했다. 하마드 사드 알오마르 사우디 지방행정부 대변인은 14일 "10개 지역 선관위에서 최소 19명의 여성 의원이 당선될 전망"이라고 발표했다.

숫자로만 보자면 선거로 뽑는 의원 2106명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점유율이다. 하지만 여성 입후보자들이 처음부터 불공정한 경쟁을 치러야 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결실이다.

사우디에선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한 유권자만 투표를 할 수 있는데, 등록자에서부터 남녀 차이는 크게 벌어졌다. 남성은 135만명인 데 비해 여성은 남성 유권자의 10%에 불과한 13만여 명만 등록했다. 올해 참정권을 갖게 된 18세 이상 여성 유권자(149만명)의 8%다. 국왕 체제인 사우디에선 지방의회가 입법권이 없고 공공시설 관리 등 지역 현안만 다룰 수 있기 때문에 남성 전체 유권자(약 350만명)도 등록률이 38% 정도로 저조하지만, 여성 등록률은 그보다도 훨씬 낮은 수치다.

사우디 여성들은 몇 년 전까지 남성의 동의 없이 신분증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유권자 등록을 할 수 없는 이가 많았다. 여성의 참정권 허용을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투표장에 줄을 서 있던 남성 유권자 압둘라 알 마이텝은 BBC에 "만약 우리 아내들이 정치를 하게 되면 누가 집에서 아들들을 돌보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 건국 이래 83년 만에 첫 투표권 행사 ]

여성 입후보자들은 선거 유세 과정도 불리했다. 여성 입후보자는 남성들 앞에서 직접 선거 유세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칸막이를 치고 말하거나 가족이나 친지인 남성 대변인이 공약을 전달해 줘야만 했다. SNS로 자신을 소개하고, 선거 공약을 전달하는 것이 여성 입후보자들에겐 유일한 홍보 창구였다.

이번 선거에서 여성 유권자의 투표율은 82%로 남성 유권자 투표율(44%)의 두 배에 가까웠다. 여성 운전을 금지하는 사우디에선 여성들이 투표소를 찾아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지만, 여성 유권자들은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여성 전용 투표장으로 몰려갔다. 여성 3대(代)가 함께 투표소를 찾은 가정도 있었고, 문을 열기도 전부터 투표장 앞에서 기다리는 여성도 있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뜨거운 투표 열기는 사우디 여성들의 억눌렸던 욕망이 분출된 결과물이다. 사우디는 여성 인권이 열악하기로 유명하다. 남성 보호자 없이는 외출도, 여행도 할 수 없고, 은행 계좌를 만들 수도 없다. 사우디에서 여성이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것도 불과 2년 전인 2013년이다. 사우디의 여성 사진작가인 타스님 아술탄은 "(정부는) 어린아이를 조용하게 하기 위해 고무젖꼭지를 물려주는 것처럼 우리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며 "하지만 나는 이번 투표로 내 딸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한 새로운 길이 열리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