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오, 모자 쓴 저 사람!" 모두가 탄성 지를 때 '패션 까막눈'도 눈 번쩍

입력 2015.12.12 03:00

패스트 패션의 선두주자 H&M '디자인 어워드'… 기자가 가보니

H&M 친숙했지만…
왼쪽엔 유명 디자이너, 오른쪽엔 할리우드 스타
결승 진출한 한국인 1명, 유학파 아니어서 놀라

패스트 패션의 선두주자 H&M '디자인 어워드'… 기자가 가보니
"근데 좀 웃기지 않니? 패션계와는 상관이 없다는 네가 패션계 사람들이 심혈을 기울여 탄생시킨 스웨터를 입고 있다는 게!"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뉴욕의 유명 패션잡지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리프)는 패션 문외한인 신입사원 앤디(앤 해서웨이)에게 이렇게 쏘아붙인다. 지난 7일(현지 시각) 영국 런던에서 열린 'H&M 디자인 어워드 2016' 행사를 취재하는 내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런던판을 찍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여기서 기자가 맡은 배역은 도도하고 세련된 미란다가 아니라 어리바리하고 촌스러운 앤디다.


패션盲, 패션 행사에 가다

의류 해외직구 경험 전무(全無). 1년에 옷 사러 백화점 가는 횟수 2회 미만. 어떤 여자들은 성경처럼 여긴다는 패션잡지를 정독한 적은 36년 인생을 통틀어 한 번도 없다. 샤넬, 루이비통처럼 대중적으로 알려진 명품 로고 정도는 알지만 그 이외의 패션 브랜드에 대해서는 문맹 수준이다(실제로 몇 년 전 친구의 페라가모 지갑을 보고 '농협 사은품이야?' 했다가 패션 지진아 취급을 받은 적이 있다).

'H&M 디자인 어워드' 취재를 앞두고 걱정이 쌓였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기사를 쓰는 것이 기자의 숙명이라지만 근의 공식도 이해 못하면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나마 의연한 척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H&M'이기 때문이었다.

스웨덴에 본사를 둔 H&M은 대표적인 중저가 SPA(제조·유통 일괄형 의류) 브랜드. 만만한 가격 덕에 '패션맹(盲)'인 기자에게도 심리적 장벽이 낮다. 게다가 H&M이 2012년 만든 '디자인 어워드'는 젊은 디자이너 육성을 위해 기성 디자이너가 아닌 디자인스쿨 졸업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주는 상(賞)이다.

옷 잘 입는 것이 '기자 정신'

행사는 켄싱턴 팰리스의 고풍스러운 건물에서 열렸다. 전 세계 19개국에서 초청받은 기자 30여 명이 모였다. 취재진을 실은 차가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외쳤다.

"오, 저 모자 쓴 사람 올리비에예요!"

모든 사람이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날렵한 검정 슈트 차림의 가무잡잡한 남자가 차창 밖을 스쳐 지나갔다.

"올리비에가 누구냐"고 옆 사람에게 물었더니 "발망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올리비에 루스텡으로 이번 행사 심사위원 "중 한 명"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패션 까막눈'도 발망은 안다. 프랑스 브랜드인 발망은 최근 H&M과 협업 제품을 내놔 서울 명동 H&M 매장 앞에 구매욕에 가득 찬 노숙 행렬을 늘어서게 했다. 검정 스커트와 분홍 스웨터 차림의 금발 여성이 등장했을 때 좌중이 또 한 번 술렁였다. 옷 잘 입기로 소문난 할리우드 배우 케이트 보즈워스라고 했다.

어떤 현장으로든 달려갈 수 있도록 기동성 있는 옷차림, 노트북 컴퓨터를 챙겨 넣은 커다란 가방…. 일간지 기자의 패션은 대략 이렇다. 차려입는 것과는 거리가 먼 그런 무심함이 때때로 기자 정신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행사장에서는 옷 잘 입는 것이 곧 기자 정신인 것처럼 보였다. 낮 기온이 13도까지 올라갔지만 모피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대부분 자그마한 클러치백을 맵시 있게 손에 들었다. 각종 자료와 카메라가 들어 있는 커다란 천가방을 멘 사람은 기자밖에 없었다. '일할 땐 편한 게 최고'라며 신고 간 운동화가 슬며시 난처해졌다.

뒷머리 숱이 숭숭 빠지고, 골판지처럼 주름진 보라색 재킷 차림의 덩치 큰 할머니가 천가방을 들고 눈앞을 지나갔다. 상대적으로 수수한 행색에 친근감이 들려는 순간, 옆자리 패션지 기자의 한마디가 찬물을 확 끼얹었다. "'수지 멘키스'라고 패션잡지계의 대모 같은 분이세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나오는 그 편집장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H&M 디자인 어워드 2016’ 결승 진출자들의 작품. 맨 오른쪽이 우승자 하나 진킨스 작품, 그 옆의 작품이 한국인 정이녹씨의 옷이다.
‘H&M 디자인 어워드 2016’ 결승 진출자들의 작품. 맨 오른쪽이 우승자 하나 진킨스 작품, 그 옆의 작품이 한국인 정이녹씨의 옷이다./H&M 제공
우승자는 영국인

이번 행사의 결승 진출자는 모두 8명. 전 세계 디자인 스쿨 40곳의 학생들이 참가했다. H&M 측은 최초 경쟁률을 비밀에 부쳤다. 우승자에게는 5만유로(약 6500만원)의 상금이 주어지며 우승작은 H&M 일부 매장에서 판매되기도 한다.

결승 진출자 중 한국인은 한 명. SADI(삼성디자인스쿨) 졸업 예정자인 정이녹(22)씨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녹색 짐승'에서 영감을 얻어 상처받은 소년의 고독을 형상화했다. 경쟁자들은 모두 뉴욕, 런던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인 스쿨 출신. 해외 경험 없는 토종 한국인이 결승에 진출한 것만 해도 고무적이다. 2013년 한국인 우승자(김민주)가 나오긴 했지만 앤트워프 왕립 예술 학교 유학생이었다.

결승 심사는 참가자들의 작품을 입은 모델이 런웨이를 걸으며 패션쇼를 펼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기자들 사이에서 우승자에 대한 추측이 난무했다. 한국 참가자의 작품이 가장 훌륭해 보였지만 감식안에 자신이 없었다.

최종 우승자는 영국 출신의 하나 진킨스(24). 솔기가 밖으로 드러나고 실밥이 늘어진 넉넉한 사이즈의 옷을 모델에게 입혀 선보였다. "여성의 몸을 완벽하게 이해한 현대적인 작품"이라는 심사평을 들으면서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것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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