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독일은 새 총리로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지난 8일 독일의 유명 정치 평론가 마르쿠스 페델치르센은 공영방송 ARD의 인기 시사 토크쇼 '사람과 정치'에 출연해 이같이 말했다. 이날 주제는 '앙겔라 메르켈의 실패한 운명'이었다. 메르켈(61) 독일 총리는 지난달 22일 총리 재임 10주년을 맞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메르켈이 2017년 총선에서 승리해 4선(選) 연임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독일엔 총리 연임 제한이 없어 심지어 차차기 집권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하지만 지난 8월 난민 포용 정책을 발표한 뒤 지지도가 급락하면서 '철의 여인' 메르켈이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다. 메르켈은 지난 8월 "내전 상태인 시리아를 탈출한 난민에 한해 무제한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그리스·이탈리아로 향하던 난민들이 대거 독일로 몰려들었다. 올해 독일에 망명을 신청한 난민은 12월 초 현재 공식적으로만 100만명을 돌파했다. 독일에 망명을 신청한 난민이 연간 100만명을 넘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독일에선 반이민 여론이 급등했다.
이달 초 발표된 독일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리로 메르켈을 지지한다는 응답은 44%에 불과했다. 오히려 '반대' 응답이 48%로 '찬성'을 웃돌았다. 지난 7월 메르켈에 대한 독일 내 지지도가 67%를 기록했던 것에 비하면 참담한 결과였다. 미 시사 주간지 타임이 지난 9일 메르켈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고, 지난달 포브스가 메르켈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위로 뽑는 등 해외 평가가 높은 것도 지지율 하락을 막는 데 역부족이었다.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9일 "독일뿐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큰 권위와 존경을 누려온 메르켈이 총리직을 걱정해야 할 상황에 빠졌다"고 보도했다.
메르켈이 난민 정책과 관련해 오락가락 행보를 보이면서, 그동안 그가 쌓아온 일관된 리더십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동안 메르켈은 '뚝심' 있는 정책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그리스 경제 위기와 관련해서도 '부채 탕감'을 해야 한다는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협상 과정에서 과감한 긴축 정책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난민 정책에선 달랐다. 난민에 대한 대폭 수용을 발표한 지 한 달 만에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입국 심사를 실시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국경 통제를 실시했다. 지난 9일엔 "난민들에게 지문과 의료 기록 등의 신상 정보가 담긴 신분증을 발급할 것"이라며 부적격자를 선별·추방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만한 조치를 내렸다. 동시에 유럽 주변국에는 난민 수용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독일 시사 주간지 슈피겔은 "유럽 경제위기 등의 문제에서 매우 이성적이고 냉정한 결단을 해왔던 메르켈이 난민 문제에선 도덕적이고 감정적인 판단을 내렸다"며 "비(非)정치적인 행동"이라고 보도했다.
최근 메르켈이 속한 기민당(CDU)의 연정 파트너 기독사회당(CSU)은 정부를 상대로 위헌 소송을 준비한다고 발표했다. 시리아 난민을 무제한 받아들이겠다고 한 메르켈의 정책이 바이에른주(州)의 자치권을 침해한다는 내용이었다. 독일 언론들은 "메르켈 정부 내에서 반란이 시작됐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