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40년 전통의 잡채밥… 老주방장이 붙잡은 세월의 맛

조선일보
  • 정동현 대중식당 애호가
    입력 2015.12.05 03:00

    [정동현의 허름해서 오히려] 서울 보문동 중국집 '안동반점'

    [정동현의 허름해서 오히려] 서울 보문동 중국집 '안동반점'
    맨밥 아닌 볶음밥 위에 잡채를 올려주는 안동반점의 특이한 잡채밥. 딸려 나오는 짬뽕 국물도 일품이다. / 정동현 제공
    "갓난아기를 보면 손을 꼭 쥐고 있지? 악력이 떨어지면 사람은 죽는 거야."

    중학교 때 잡다하게 아는 게 많던 사회 선생님이 '악력(握力)'이란 단어에 힘을 주고 말했다. 아마 그 뒤로 무언가를 손에 쥐려는 인간의 욕망 등등으로 이야기가 뻗어나갔던 것 같은데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근래 잊고 있던 이 '악력'이란 단어를 다시 들었다. 보문동 '안동반점' 간다는 소리를 누구에게 했을 때였다.

    "지금 가면 주인 할아버지 악력 떨어져서 맛이 덜한데…."

    그때가 오후 3시, 주방을 책임지는 주방장이 연로해서 지금쯤 가면 힘에 부쳐 있을 거란 설명이 뒤따랐다. 그런가? 내심 의심했지만 경험자 말이므로 사려 깊게 다음 날로 방문을 미뤘다. 지하철역에서 1분 거리, 좁은 골목 안 안동반점 앞에 가니 줄을 선 사람들과 한자로 가게 이름이 새겨진 빨간 간판에 눈에 띄었다. 잠시 후 내 앞으로 낯익은 빨간 오토바이가 섰다.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였다.

    "배달하는 집에 가지 마라."

    좀 먹는다 하는 사람들이 중국집을 고르는 첫째 조건이다. 배달하는 집 음식은 배달하지 않는 집 것만 못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나 역시 당구장이 아닌 이상 배달 온 중국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유명한 중국집이 배달이라니?

    차례를 기다려 들어간 홀은 그야말로 장사진이었다. 휴일 점심, 일부러 먼 곳에서 찾아온 가족도 있었고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도 있었다. 내가 알기로 이 집이 방송에 나온 것도 몇 차례. 사연을 들으니 가게가 유명해져 워낙 바쁜데도 단골들 때문에 원래 하던 배달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괜히 마음이 숙연해졌다. 이 바쁘고 바쁜 집의 대표 메뉴는 잡채밥. 사위를 둘러보면 둘 중 하나는 잡채밥(6000원)이고 전화로 걸려온 주문을 확인하는 종업원 입에서도 잡채밥이란 말이 연신 나왔다. 그렇다면 먹어야 할 것은 역시 잡채밥. 탕수육도 작은 것(12000원)을 하나 시켰다. 그 무렵 눈에 띈 안내문 하나.'주방장 어른신이 연세가 있으신 관계로 음식이 나오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양해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숙연해진 나. 그러나 안내판이 미안할 만큼 주문은 계속 들어왔고 그것에 항의라도 하듯 주방에서 요리는 끊이지 않고 나왔다. 내 탕수육도 오래지 않아 내 앞에 놓였다.

    가격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될 만큼 많은 양이었다. '이거 팔아서 어떻게 장사하나요'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시중 유명 탕수육 맛집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분명 수준급이었다. 뒤이어 나온 잡채밥을 마주하니 보문동 인심이 몸으로 느껴졌다. 흘러넘치는 잡채 고명 아래 흰밥이 아니라 볶음밥이 격을 더했다. 무엇보다 맛. 악력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 그 맛에는 저 주방의 뜨거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이 밥과 잡채밥을 볶아내는 중화 냄비 웍(wok)에서 탄생한 불맛을 저 본토 사람들은 웍의 숨결, 웍헤이(wok-hei·鍋氣)라고 한다. 3mm가 채 안 되는 얇은 냄비 바닥과 1000도까지 오르는 프로판가스 불, 그리고 주인장의 격한 노동이 만들어낸 열띤 숨결에 사람들은 40년 넘은 이 가게 앞에 줄을 서거나 오래된 전화번호를 누른다.

    가게를 나오다 주방을 슬쩍 보니 한눈에도 연세가 되어 보이는 노인 한 분이 두툼한, 아직 악력이 죽지 않은 그 손으로 커다란 웍을 붙잡고 있었다. 그 순간 입안에 남은 맛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이가 그렇게 꽉 쥐고 살아온 한 세상이 내가 먹은 한 그릇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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