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 동국대 한방병원의 한 병실. 병상에 걸터앉은 중년 남성이 왼손에 연필을 쥐고 꽃 그림을 그렸다. 1년여 전 뇌수술을 받은 김이경(62)씨가 매일 하는 재활훈련의 하나다. 아내가 "얼른 일어나서 아이들 웃는 거 보러 가자"며 수시로 말을 걸었지만, 남성은 가벼운 미소만 지을 뿐 말이 없었다. 김씨는 지난해 6월 뇌출혈로 쓰러졌다.

몸 오른쪽이 마비된 김씨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여다보는 게 있다. 지난 5월 에티오피아 아이들이 "빨리 나으세요"라며 보내온 편지다.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에서 동쪽으로 150여㎞ 떨어진 하브로(Habro)의 한 마을에 사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아이들이다.

지난 17일 경기 성남시 동국대 한방병원에서 김이경씨가 왼손에 연필을 쥐고 꽃 그림을 색칠하고 있다(왼쪽 사진). 2010년부터 김씨의 후원을 받고 있는 에티오피아 하브로 지역 어린이들이 식수 시설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오른쪽 사진).

김씨는 그동안 하브로의 이 마을 아이들을 후원해왔다. 김씨의 후원은 지난 2010년 국제 구호단체 월드비전을 통해 에티오피아 아동 두 명을 돕는 것으로 시작됐다. 김씨의 아내 조한옥(59)씨는 "처음엔 6·25전쟁에 참전해 도움을 준 에티오피아가 유난히 끌려서 후원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한 마을을 통째로 돕는 '김이경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 이듬해부터다. 조씨는 "후원 아동과 엽서를 주고받다가 이 아동이 12남매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 순간 한두 명을 돕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그렇게 4년 동안 김씨 부부는 이 아동이 사는 지역에 1억8000만원을 후원했다.

김씨는 젊었을 때 대기업 전자회사 연구원으로 일하다 독립해 지난 2002년 조그만 에어컨 시공 전문 업체를 차렸다. 사업은 순조로웠다. 그러자 못 이룬 어렸을 적 꿈이 생각났다. "슈바이처 박사처럼 의사가 돼 가난한 나라를 돕겠다"는 꿈이었다. 그래서 2010년 시작한 게 한 달에 3만원씩을 후원하는 일이다. 그러다 "고맙다"는 아이들의 엽서를 받고선 후원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소와 염소 150여 마리를 지원하고 이 마을에 화장실과 식수대도 설치해줬다. 2012년엔 마을에 초등학교 건물도 지어줬다. 얼마 있으면 과학실험실과 도서관까지 갖춘 두 번째 학교도 완공된다. 그가 후원한 소와 염소들이 새끼를 낳아, 이 마을 사람들은 이제 가축을 키워 아이를 학교에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김씨는 아직 에티오피아에 가본 적이 없다. 지난해 봄부터 자신이 세운 에티오피아 학교를 방문하려고 한참 일정을 짜다가 쓰러졌다.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할 정도로 병세가 중했다고 한다. 에티오피아를 찾으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됐다. 아내 조씨는 "남편은 쓰러지기 직전까지 '에티오피아 마을의 전기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태양열 발전 설비를 후원할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김씨에게 지난 5월 에티오피아 아이들이 편지를 보내왔다. "마음속 깊이 김이경 후원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말로 시작한 편지는 "미스터 김은 시간과 물질, 그리고 영혼을 담아 저희의 어려움을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이런 선물을 절대 잊을 수 없으며, 세대를 이어 기억할 것입니다"라는 말로 맺었다. 아이들은 편지에서 "미스터 김이 아프니 우리 마음도 너무 아프다"며 "빨리 일어나 우리를 보러 와달라"고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