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80년대 이 캠퍼스는 무채색, 나는 빨간 코트를 찢어버리고… 시위대의 일원이 되었다

조선일보
입력 2015.11.21 03:00

90년대 베스트셀러 詩集 '서른, 잔치는 끝났다' 개정판 낸 詩人 최영미

난 운동권 논리의 아름다움에 반한것 '군부독재 종식' 대의를 위해 한건 아냐
선배들이랑 함께 있으면 덜 외로웠고… 학교수업보다 세미나가 더 재미있었다

개인이고 싶었지만 시대로 解讀된 그녀… 삼포세대, 386세대를 부러워한다고?
성인이 된다는건 어느시대나 힘들어 詩는 취업 실패자였던 나의 탈출구

전두환 장남 출판사 다니다 등단 아이러니… 직장서 잘리고 취직 못하고 있자
엄마가 말했다 "네 인생은 실패다" 이후 집 나와 신림동 고시원서 習作

1981년 10월 서울대 관악 캠퍼스. 서양사학과 2학년 여학생 하나가 경찰에 연행됐다. 그날 시위에 참여한 혐의였다. 열흘 구류에 무기정학 처분이 떨어졌다. 체포 당시 그는 체육복 위에 치렁치렁한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당시 운동권 여학생들에게선 보기 드문 차림새였다.

90년대 베스트셀러 詩集 '서른, 잔치는 끝났다' 개정판 낸 詩人 최영미
시인 최영미가 모교인 서울대를 찾았다. 이날 단풍은 찬란했지만 그가 회고한 1980년대의 캠퍼스는 무채색이었다. 그는 “1학년 겨울이 되어서야 운동권에 합류했고, 선배들의 이념 교육 진도를 못 따라가 ‘백치미인’이란 소리도 들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그 주변에 있었던 건 나의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 이태경 기자
"유난스러운 옷차림 때문에 잡힌 거였다. 코트 자락 너풀거리며 시위에 참여했다가 채증(採證)하는 경찰 카메라에 딱 찍혔다. 체육 수업 가는 길에 추워서 코트를 걸쳤는데 사진에 찍힌 옷과 일치하니 꼼짝 못 하고 끌려간 거다."

지난 10일 시인 최영미(54)는 감색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34년 전 체포됐던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크로폴리스'라고 하는, 서울대 대학본부와 중앙도서관 사이 공터. 80년대 민주화 시위와 집회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그의 대표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개정판이 최근 나왔다.

시집 50만부 넘게 팔린 '스타 시인'

90년대 베스트셀러 詩集 '서른, 잔치는 끝났다' 개정판 낸 詩人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낸 1994년 당시의 최영미. / 조선일보 DB
1994년 창비에서 나온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출간 4개월 만에 30만부 팔렸다. 지금까지 누적 판매량은 50만부가 넘는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이라고 시작하는 표제작은 '80년대 학생운동 세대의 내면 기록'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인구에 회자됐다.

―서른네 살에 '스타 시인'이 됐다. 인생의 절정이 너무 일찍 온 건 아닌가.

"그걸 '절정'이라 할 수 있을까. 당시 나는 오히려 시달린다는 느낌이었다. 인터뷰가 쏟아졌는데, 끝나는 즉시 병원으로 달려갔다. 가족 중 한 명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집안 형편도 어려웠다. 첫 시집이 잘된 게 나에겐 오히려 안 좋았던 것 같다."

―안 좋았다니?

"'다른 직업을 구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먹고살겠지'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다. 이후에 낸 책들은 그만큼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10년 전부터는 책을 낼 때마다 더 가난해졌다. 책을 쓸 때엔 특강 같은 부업도 못 한다. 밥해 먹을 시간이 없어 매끼 사 먹으니 생활비는 더 들어간다. 냉정하게 손익 계산을 해보니 절필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더라."

이날 학생회관 서점에서 만났을 때 최영미는 매대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여기 내 책이 없네요"라고 첫마디를 건넸다. "'젊은 독자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너무 안 한다'는 충고를 들었다. 인터넷맹(盲)에 SNS도 안 하니 내 독자가 새로 생길 리가 없다."

―90년대 중반엔 그 시집이 왜 그렇게 인기 있었을까.

"나는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그즈음 그만큼 정돈된 언어로 쓴 시가 없었다'고 하기도 했다."

―미모의 여성작가라 잘 팔린 건 아니고?

"부정할 수 없다. 시치미 떼는 것도 위선 아닌가(웃음)."

―대중은 환호했지만 어떤 평론가들은 '쉽게 쓴 시'라고 혹평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훌륭한 문학 작품은 독자 절반을 행복하게 하고 절반은 분노하게 한다'고 했다. 그 말로 답을 대신하겠다."

―'잔치는 끝났다'는 구절을 놓고 해석이 분분했다.

"서른 살 무렵, 대학 때 서클 멤버들이 모인다는 연락을 받고 쓴 시다. 그 무렵 자리를 파하고 계산을 할 때쯤엔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취직한 애들은 돈을 내고 취직 못 한 애들은 돈을 못 냈으니까. 대학 시절엔 함께 어우러지던 사람들이 계산을 마치고 각자 길을 가는데 나는 아직 내 길을 못 찾은 것 같은 느낌을 표현한 시였다. 어영부영 어울리던 시대는 끝났다는 의미였는데 '운동은 끝났다'는 뜻으로 읽히길래 경악했다."

80년대 대학가의 이질적 탐미주의자

늦가을 캠퍼스의 단풍 빛이 짙었다. 80년대 초 이 캠퍼스에서 탐미주의자 최영미는 이질적 존재였다. 레이스 달린 치마를 입고 등교했다가 비난받은 적도 있었다. 개인이 개인일 수 없었던 시대, 예쁜 것을 좋아하는 본성 따위는 억압해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남학생들 시선이 부담스러워 화장실에서 혼자 도시락 먹던 여대생이 어떻게 운동권에 발을 들였나.

"80년 12월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갑자기 데모가 터졌다. 온몸에 태극기를 휘감은 남자가 처연한 눈빛으로 경찰에 끌려갔다. 유인물을 주워 읽었더니 광주에 대한 내용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어두침침했다. 새로 맞춘 빨간 코트를 입고 등교한 날이었다. 빨간 옷 입은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날 집에 와서 가위로 그 코트를 조각조각내 버렸다. '무림 사건'이라고 하는 그 시위 이후로 내 인생이 바뀌었다. 며칠 뒤 선배들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히길래 발길 끊었던 서클에 찾아가 '다시 공부하러 왔습니다' 했다."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더 좋아했다'고 시(詩)에 썼다.

"사실이다. 군부 독재를 끝내고자 하는 운동의 대의(大義)를 위해 운동권에 있었던 건 아니었다. 대의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나는 늘 회의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운동권 선배들과 함께 있으면 덜 외로웠고, 학교 수업보다 선배들이 하는 세미나가 더 재미있었고 그들이 멋있어 보였다."

―결국 아름다운 것이 좋아 그 세계에 있었다는 이야긴가.

"그렇다. 나는 운동권 논리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인간 해방의 논리, 자유와 평등이라는 그것이 아름다웠다."

최영미는 대학 4학년이던 스물세 살 때 운동권 선배와 결혼식을 올렸다. 혼인신고 없이 4개월여 만에 갈라섰다. 그는 "그 남자를 사랑했다기보다는 선망 대상으로 여겼다. 나는 논리에 어두운데 언더 서클 출신의 그는 말을 잘했다. 내가 운동을 그만둬도 그의 뒷바라지를 하면 되겠다 싶었다"고 했다.

―당신 소설 '청동정원'의 여주인공은 운동권 선배랑 결혼했다가 남편의 폭력 때문에 헤어진다.

"그 소설은 자전적이라고 하기엔 각색한 부분이 많다. 운동권 남편에게 폭행당해 이혼한 경험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세대 여자들에겐 흔하다. 운동권 남성 전체가 폭력성향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랫동안 거대한 폭력과 조직적으로 싸우다 보면 어느새 그들을 닮아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전재국의 출판사서 일하며 시 써

최영미를 만난 날,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미국 내 재산을 환수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최영미는 1992년 1월부터 8개월 남짓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씨가 사장인 출판사 '시공사'에서 일했다. 그 시절 쓴 시들로 그는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다.

―전두환 정권과 맞서 싸우던 사람이 시공사에 들어가다니.

"아버지 사업이 망해 집이 어려워졌는데 취직이 안 됐다. 당시 운동권에선 취직을 자본주의를 위해 일하는 거라고 생각해 치욕으로 여겼다. 졸업 후 '자본론' 번역 서클에 있다가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고 88올림픽 즈음에야 직장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스물일곱이 넘으면 취업이 힘들던 때였다. 매일 열 곳 스무 곳씩 원서를 냈는데 몽땅 떨어졌다."

―그래서 타협한 건가.

"영어 과외를 하며 뺑뺑 돌다가 사회과학 서적 출판사에 취직했는데 몇 달 후 사장이 바뀌면서 해고당했다. 나이는 서른이 넘었지, 직장에선 잘렸지…. 어느 날 엄마가 내 방문을 열고는 '네 인생은 실패'라고 했다. 충격을 받고 집을 나와 친구한테 꾼 돈으로 신림동에 고시원을 얻었다. 당시 홍익대 미술사학과 대학원에 적을 뒀는데 대학원 선배가 시공사에 추천해 줬다. 사장이 누군지 뒤늦게 알고 운동권 선배 언니한테 상담했더니 '못 들어갈 이유가 없지. 너 불러주는 다른 데가 있냐' 하더라. 거기서 쓴 글로 창비에서 등단했다는 것이 내 인생에서 크나큰 아이러니다."

인터뷰 장소인 교내 카페에선 학생들이 과제에 열중해 있었다. 그 청춘들 얼굴에 서른한 살 최영미가 겹쳐졌다. 연달아 취업에 실패하고 고시원에 틀어박혀 '직업적 혁명가의 길은 직업적 실업자의 길이었나' 같은 시를 끄적였다는 그녀다. 언제나 '개인'이고자 했으나 자주 '시대'로 해독(解讀)되었던 이 시인은 "요즘 '삼포 세대'는 고도성장 사회에서 청춘을 보낸 386 세대를 부러워한다"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성인이 된다는 건 어느 시대에나 힘들다. 서른 즈음 쓴 시를 20년 만에 다시 읽어보니 당시 내 안에서 분노가 끓고 있었다는 걸 알겠다. 시는 취업 실패자였던 나의 탈출구였다."

며칠 후 그가 보내온 시집에 예이츠의 '다시 읊은 옛 노래'가 적힌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지나간, 그리고 현재의 청춘들을 위한 위무(慰撫)로 읽혔다.

"(…)강가의 들판에서 내 사랑과 나 서 있었네/ 내 기울어지는 어깨에 그녀는 눈처럼 하얀 손을 얹었지/ 그녀는 내게 인생을 쉽게 생각하라고, 마치 둑 위에 풀이 자라나는 것처럼 받아들이라 했지/ 그러나 나는 어리고 바보스러웠고, 그래서 지금 눈물로 가득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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