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급량 줄어 일주일이면 바닥"… 쿠바 서민들 아우성

조선일보
입력 2015.11.17 03:00

[사회주의 흔들리는 쿠바… 박국희 특파원 르포]

서민 한달 수입 30달러 불과, 배급품 없이는 생활 어려워… 달러 만지는 중산층은 외면
年10억달러 비용 부담되지만 공산혁명 상징이라 못 없애

박국희 특파원 사진
박국희 특파원
쿠바 수도 아바나 시내의 국영 배급소 '보데가(bodega)'. 배급 수첩을 든 시민들이 저마다 식료품을 타가고 있었다. 배급이라고 하지만 공짜는 아니다. 주민 페레스씨는 "매일 아침 빵 1개씩을 1모네다(50원)에 사가고 있다"고 말했다. 일반시장 가격의 10분의 1 수준으로 식료품을 사는 것이다. 페레스씨는 "닭고기는 한 달에 한 번, 소금은 석 달에 한 번 나온다"며 "해마다 배급 품목이 줄어들어 갈수록 배급 수첩의 두께도 얇아지고 있다"고 했다. 그의 낡은 수첩에 적힌 배급 품목은 쌀, 콩, 식용유, 설탕, 커피 등 10개 항목이 전부였다.

사회주의 국가 쿠바가 올해로 도입 53주년을 맞은 '공산 혁명의 상징' 배급제를 축소하고 있다. 1100만 인민의 밥상을 책임지는 데 매년 10억달러 이상이 소요되고 있기 때문이다. 라울 카스트로 국가 평의회 의장이 "터무니없는 가격(laughable price)으로 식료품을 제공하는 배급제는 쿠바 경제에 견딜 수 없는 부담으로 변모했다"며 "노동자의 근로 의욕까지 저하시키고 있다"고 비판했을 정도다. 이후 감자, 담배, 비누, 치약, 세제 같은 기존의 배급 품목이 차례로 폐지됐다.

썰렁한 배급소 진열장 - 쿠바의 국영 배급소 ‘보데가’에서 시민들이 배급품을 받고 있다. 벽 위에 쿠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의 얼굴이 보인다.
썰렁한 배급소 진열장 - 쿠바의 국영 배급소 ‘보데가’에서 시민들이 배급품을 받고 있다. 벽 위에 쿠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의 얼굴이 보인다. /박국희 특파원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쿠바 국민은 배급 한 번으로 한 달을 살 수 있었다. "가난하지만 굶어 죽는 쿠바인은 없었다"는 시절이다. 1989년 소련 붕괴 후 매년 지원받던 40억~60억달러의 원조금이 끊기자 쿠바 경제도 휘청댔다. 아바나 시민 제니퍼씨는 "지금 나오는 배급량은 일주일이면 모두 바닥난다"고 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최근 배급제는 쿠바 성인 1일 필수 칼로리의 36%를 12일밖에 책임지지 못할 정도로 양이 줄어들었다.

소득 수준과 상관없이 전체 360만 쿠바 가정에 한 권씩 배급 수첩을 주다 보니 자원의 효과적인 배분도 어려웠다. 아바나의 부촌(富村) 미라마르 지역에서 스페인계 기업에 다니는 양켈씨는 "식료품 상태도 좋지 않은데 왜 줄까지 서가며 배급소에 가야 하느냐"고 했다. 2011년부터 200개 분야에 자영업을 허가한 쿠바에도 빈부격차가 나타나고 있다. 레스토랑이나 술집 주인, 택시 기사와 관광업계 종사자 등 외국인을 상대로 달러를 모으는 신흥 중산층은 이미 국가의 배급 시스템을 외면한 지 오래다.

문제는 배급제 폐지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작년 미국과 수교 이후에도 "사회주의 이념은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라울 카스트로에게 배급제의 폐지는 사회주의 체제 실패를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한 달 30달러 수준의 월급을 받는 일반 서민층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일각에서는 정부 주요 관료들이 사는 아바나 베다도 지역의 배급소 빵 크기가 훨씬 크다며 문제를 제기할 정도다. 공무원으로 정년 은퇴 후 매달 15달러 연금으로 생활하는 라우라씨는 "쿠바인 중 누구도 배급으로만 살 수는 없지만 아직도 많은 쿠바인은 배급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했다. 현재 한 달치 배급 품목을 사는 데 드는 비용은 평균 2달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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