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는 취업 준비생 이모(27)씨는 최근 과외비 계좌를 만들려고 집에서 가까운 은행에 갔다가 "과외비 용도라는 증빙서류가 없으면 발급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근로계약서를 쓰는 것도 아니고 사업자등록을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증빙서류를 떼오느냐"고 했더니 은행 직원은 "본사 지침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결국 이 은행 계좌 개설을 포기했다.

최근 은행들이 대포통장 근절을 위해 계좌 개설 요건을 강화하면서 증빙서류가 없으면 통장을 만들기 어려워졌다. 지난해부터 금융거래목적확인서를 작성하게 한 데 이어 올 7월부터는 재직증명서·사업자등록증 등 증빙서류를 가져와야 신규 통장을 발급해주고 있다. 무직자의 경우 계좌 개설이 매우 어렵다 보니 '통장 만들기가 고시만큼 어렵다'는 뜻에서 '통장 고시'란 말도 생겨났다. 금융감독원과 은행 측은 대포통장 근절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왜 통장을 발급해주지 않느냐'는 민원도 끊이지 않고 있다.

"거래 실적 있으세요?"…'통장고시'시대

지난 3일 오전 서울 은평구에 있는 국민·농협·신한·우리·하나은행 5곳을 다니면서 계좌를 신설해 달라고 물어봤다. "통장을 만들고 싶다"는 말에 다섯 곳 모두 "(우리 은행에) 거래 실적 있느냐"를 먼저 물었다. "이 은행과 거래한 적이 없다"고 하니 통장의 용도가 뭐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통장 사본을 내야 한다"고 했더니 근로계약서나 사업주 전화번호가 적힌 사업자등록증을 요구했다. 사업자등록증을 가져오면 전화를 걸어 실제로 재직 중인지 확인한다고 했다.

"증빙서류를 떼달라고 하기 곤란한데 다른 방법이 없느냐"고 말해봤다. 농협·신한은행은 "방법이 없다"고 했고 국민·하나은행은 '금융거래 목적 확인을 위한 증빙서류' 목록을 보여주며 "이 중에 낼 수 있는 서류가 있느냐"고 물었다. 급여계좌 용도라면 재직증명서를, 모임 계좌면 구성원 명부를, 공과금 이체 계좌라면 공과금 납부 영수증을 내는 식이었다.

이번엔 말을 바꿔서 기존 거래 실적이 있다고 말해보기로 했다. 실제 거래가 있던 우리은행에서 "원래 쓰던 통장이 있는데 하나 더 만들고 싶다"고 요청했다. 직원은 "신규 발급이 가능하다"며 "오늘 발급받으면 앞으로 한 달 반 정도는 다른 은행에서 통장 발급이 어려운데 괜찮으냐"고 물었다.

직업이 없는 70대 이상 노인들도 통장 만들기가 어려워졌다. 증빙서류를 제출하기 힘든 데다 관련 서류를 어디에서 떼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 은행 직원은 "우리 지점은 어르신들이 많이 이용하시는데 예전에 발급받고 안 쓰던 통장을 가져와 살려달라고 하실 때가 많아 난감하다"고 했다. 은행 계좌는 통상 마지막 거래 후 6개월이 지나면 이를 풀기 위해서 신규 통장 발급과 동일하게 증빙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금융사고 예방 위해 어쩔 수 없다"

각종 증빙서류를 받는 것은 금융 당국 지침이 아니라 은행들이 자율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규정이다. 관련법이 있는 게 아니다 보니 불만도 나온다. 대기업에 다니는 강모(29)씨는 "집 근처 은행에 갔더니 재직증명서를 떼오라고 했는데 회사 근처 은행에 가니 명함 한 장에 통장을 만들어줬다"며 "은행·지점마다 다 다르게 대응하니 통장 발급을 쉽게 해주는 은행을 찾는 '은행 쇼핑'을 하게 된다"고 했다.

은행들은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대포통장 발급 건수 순위권에 오르면 은행 이미지가 나빠질 뿐 아니라 대포통장 사고가 발생하면 금융 당국의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신규 통장을 발급받으려는 사유나 조건 등이 워낙 다양해 현장에서 유연하게 대응하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금융감독원도 당장 규제를 완화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통장 발급 절차 강화 등 강력한 대책을 시행하면서 올 상반기 금융 사기 피해액이 1565억원으로 지난해 하반기의 2023억원에 비해 22%가량 줄었다"며 "성과가 크기 때문에 은행들의 자율적 계좌 관리를 막기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