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30):일두 정여창과 함양(中)] 마치 그림 연상시키는 개평마을 고택들

    입력 : 2015.10.26 06:38 | 수정 : 2015.10.26 12:51

    <上편에서 계속>
    어떻습니까, 마치 세조(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살해해 묻지도 못하게 강원도 영월 청령포 앞 강물에 던진 것이 연상되지않습니까? 그렇다면 세조의 후손들인 예종-성종-연산군은 모조리 정통성이 부인되니 그야말로 역모 중의 역모가 되는 겁니다.

    글의 위력은 이렇게 무섭지요. 귀양지인 종성에서 사망한 일두의 시신은 친구와 제자들에 의해 두달만에 함양 남계서원 뒤 승안산 기슭에 안장됐는데 그후 그는 고려 대의 백이정-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으로 이어지는 유학의 적통(適統)으로 숭상받게 됩니다.

    그의 학풍에 대해서는 유학에 문외한인 제가 논했다가는 웃음거리가 될 것만 같아 생략합니다. 다만 친구 김굉필과 함께 일두는 이렇게 비교됐다고 합니다. “한훤(寒暄·김굉필)은 이(理)에 밝고 일두(一蠹·정여창)는 수(數)에 밝다.” 또 그는 평생 시를 딱 한 수만 남겼습니다. 두류산(頭流山), 즉 지리산에 터를 골라 집을 지을 때 지은 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람에 부들이 휘날리어 가볍고 부드럽게 희롱하는데
    (風蒲獵獵弄輕柔)
    사월에 화개에는 보리가 벌써 가을일세
    (四月花開麥已秋)
    두류산 천만 골짜기 다 구경하고서
    (觀盡頭流千萬疊)
    조각배로 또다시 큰 강 흐름에 내려가네
    (扁舟又下大江流)’

    여기서 나오는 화개는 지금의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인 화개장터를 말하는 것이고 큰강 흐름이란 섬진강을 말하는 듯 합니다. 부들은 습지에서 자라는 식물로 주로 억새-갈대와 비유되는데 마치 요즘 같은 가을날의 한 서정(抒情)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런 사전 지식을 바탕에 깔고 함양 개평마을로 가봅니다.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펼쳐지는 일두고택. 오른편의 소나무가 불의에 굴하지않는 선비의 기상을 보여준다.
    개명마을에는 고색창연한 기와지붕을 이고있는 고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마치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합니다. 일두고택 외에도 하동 정씨, 풍천 노씨, 초계 정씨 3개의 가문이 종택이 있습니다.
    일두 고택에서 상징적인 건물이 이 탁청재다. 마음을 맑게 닦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이 고택 사이에 있는 길들이 자동차 두대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꽤 넓고 바닥에는 커다랗고 평평한 돌들이 깔려있습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분에게 여쭈니 그가 바로 일두의 후손 가운데 한분이었지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두 고택으로 들어가기 전 담장에 봉숭아가 피어있다. 그야말로 울밑에 선 봉선화다.

    일두고택의 소나무를 뒷쪽에서 본 모습이다. 이 고택에선 한옥체험도 할 수 있다.
    “일두 선생의 할아버지께서(증조부 정지 선생을 말하는 듯 합니다) 서울의 명동과 이곳의 풍수를 봤습니다. 명동은 돈은 많이 벌 수 있는 곳이지만 큰 인물이 나기 어렵고 함양 개평마을은 돈도 많이 벌고 큰 학자도 나오는 곳이라 이곳에 터전을 잡게된 겁니다.”
    일두 고택의 문고리다. 이것이야말로 한국미의 정수다.

    실제로 이 마을에는 부자가 많아 물건을 운반하는 말이나 마차의 통행이 많았습니다. 만일 흙길 그대로였다면 비오는 날이나 장마철에 진흙밭이 될 텐데 바닥에 깔아놓은 돌 때문에 수월하게 말과 마차가 지나다닐 수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그럴듯하지요? 마치 런던의 오래된 거리에 마차가 지나다닐 수 있게 포도(鋪道)를 해놓은 것보다 더 운치있습니다.

    그분에 따르면 안동 하회마을-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언젠가 정부에서 이곳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려 했으나 개평마을에서 고사했다고 합니다. 세계유산이 되면 좋은 점도 많겠지만 관광객들로 전통 가옥이 훼손될 것을 우려했다고합니다.

    개평마을 앞에는 작은 개천이 흐르고있는데 바로 이곳을 경계로 옛날 양반과 상민(常民)들이 살던 지역이 갈렸다고 하는데 사실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개천 밖 큰 도로 주변에는 상점도 많지만 개천 안쪽에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개평마을 초입에 일두 고택이 있습니다. 3000평정도의 넓은 집터에는 솟을대문, 행랑채, 사랑채, 안사랑채, 중문간채, 안채, 아랫채, 광채, 사당 등 총 11개 동의 건물이 들어서있는데 이가운데 사랑채는 18세기에 개축됐다고 하지요.
    일두 고택 사랑채에는 '문헌세가'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동방오현의 한분으로 꼽힌 정여창선생을 기린 말이다.

    일두 고택의 안채 마당에 방문객들이 앉아 가을의 정취를 즐기고있다.
    일두고택에는 볼 것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대문 위에 걸려있는 정려패(旌閭牌)입니다. 효자가 있는 가문에만 나라에서 하사한다는 정려패가 무려 다섯개나 됩니다. 일두 선생도 천하의 효자로 알려졌는데 그 가풍이 이어졌다는 뜻입니다.
    일두 고택 정문에 걸린 정려패다. 나라에서 효자에게 내리는 정려패가 다섯개나 걸린 집은 이곳뿐이다.
    일두고택 맞은 편은 일두선생의 종손이 거주하고있으며 일두고택과 종손 거주지가 맞닿은 골목에 전통주를 파는 곳이 있습니다. 일두 선생의 종부(宗婦)가 집에서 내려오던 전통 그래도 만든 가양주(家釀酒)인데 이름은 ‘솔송주’로 맛이 일품입니다.

    일두 선생의 하동 정씨 집안에서는 1년에 쌀 삼백석으로 술과 엿과 식혜를 빚어 손님을 접대하고 임금님께도 진상했다고 합니다. 16대, 530여년간 이어져 내려온 솔송주는 사대부 집안의 전통명주라고 할 수 있는데 돗수가 높은 것이 더 비쌌습니다.<下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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