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2일 청년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청년희망펀드에 200억원의 사재를 출연한다고 삼성그룹이 밝혔다. 이 회장은 아버지 이병철 회장 세대를 이어 대한민국 산업계를 이끌어온 2세대 총수들 가운데 얼굴이다. 총수 1세대가 대한민국 경제근대화의 초석을 낳았다면 그가 주도한 2세대는 대한민국 경제를 세계화시켰다. 이 회장의 삶과 업적을 시리즈로 되돌아본다./편집자
먼저 어린 시절의 이건희부터 살펴본다. 이건희 회장은 세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 같진 않다. 이건희는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선친인 이병철은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삼성상회를 경영하고 있었다. 삼성상회는 청과물과 건어물을 취급하는 무역회사로 이병철이 이제 막 사업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였다. 당시 대구에는 이건희 위로도 6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있었으므로 그의 어머니는 어린 이건희를 돌보기 어려웠다. 이건희의 어머니인 박두을 여사는 3남인 이건희를 낳은 후 젖을 떼자마자 그를 의령의 시어머니 댁으로 보낸다. 의령의 친가로 보내진 이건희는 갓난 아기때부터 친할머니집에서 친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유모의 손에서 컸다. 유모에게는 이건희 또래의 딸이 있어 그 딸과 함께 오누이처럼 함께 자랐다.
그가 엄마를 다시 본 것은 네살이 되어서였다.네살이 되어서 그는 대구의 어머니에게 보내졌던 것이다. 어머니를 처음 보았을 때 이건희는 좀 혼란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때까지 할머니를 어머니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누구냐고 물어보기까지 할 정도였다. 또 형과 누나도 그때 처음 보았다. 누나들을 같은 형제인줄 모르고 ‘네 엄마는 누구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는 거기서 유치원을 다녔다. 어린 시절의 그는 예상 밖으로 풍족하게 지내지 못했다. 주로 까만 통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어쩌다 흰 고무신이 생기면 아낀다고 구석에 숨겨놓고 신을 정도였다. 먹고 살만 한 집안이었지만, 근검절약하는 가풍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집안은 증조모 때에 부를 쌓았다. 증조모가 한끼를 덜 먹고 베 한필을 더 짜는데 몰두했다. 안 먹고 안쓰는 것이 재산을 늘릴 수 있는 유일한 시대였다. 증조모 시절에 그렇게 악착같이 노력해서 4백석 지기의 부를 이루었다. 조부는 거기에 1백석을 더 늘려 5백석까지 만들었다. 그 5백석을 이병철의 형인 이병각이 3백석,동생인 이병철이 2백석씩 물려받았다. 대구 시절 그의 집안은 두평짜리 방3개, 세평짜리 방 한 개 등 4개의 방에 모두 열 대여섯식구가 살았다. 이병철 내외와 3남4녀, 그리고 일군들이 함께 살았던 것이다. 방4개에 열대여섯 식구가 살았으니 매우 비좁았다.
유치원 때 이건희가 소풍가는 날, 그의 어머니는 김 다섯장과 삶은 달걀 한개를 다른 형제들보다 더 넣어주었다. 그날이 이건희의 생일날이어서 특별 보너스로 더 준 것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근검절약으로 재산을 모아온 집안이어서 허풍더풍 쓰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당시 이건희 위로는 이맹희, 이창희 두 형과 인희, 숙희, 순희, 덕희 등 네명이나 되는 누나가 있었다. 이병철은 그 당시 사업 때문에 몹시 바빴고 누나와 형들은 학업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온 가족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것이 이건희가 중학교 3학년때였다고 한다. 그날 온가족이 처음으로 만난 것을 기념해서 가족사진을 찍었을 정도였다. 그는 초등학교를 여섯군데나 옮겨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