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혹시 카페인가요? 아니요! 럭셔리 만화방

    입력 : 2015.10.09 17:14 | 수정 : 2015.10.10 03:01

    예전 만화방은 잊어라
    눕고 엎드려서 만화 실컷, 테라스에선 맥주도 홀짝
    힐링·데이트하는 장소로 홍대·신사동에 속속 오픈


    서울 홍익대 근처에 있는 '청춘문화싸롱'에 들어서자 커피 머신 앞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가게 안에 나란히 놓인 이층 침대에선 손님들이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다. 테라스에선 맥주를 마실 수도 있고, 매주 수요일에는 인디밴드 공연도 열린다. 카페 겸 공연장인 셈이지만 이곳의 정식 업종은 만화방이다. 가게 한쪽을 가득 채운 만화책들이 이 가게의 진짜 정체를 보여준다.

    만화 시장의 주도권이 온라인으로 옮겨가며 전국 만화방 수는 2011년 811개, 2012년 782개, 2013년 761개로 꾸준히 줄고 있다. 하지만 최근 홍대·대학로·강남 번화가 등을 중심으로 만화방이 되살아나고 있다. 낡은 소파에 앉아 컵라면을 먹으며 만화를 보던 만화방이 아니다. 깔끔한 인테리어 디자인은 물론이고 큰 대자로 누워서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침대나 다락방도 갖췄다. 카페와 맥주펍, 공연장은 덤이다. 홍대 근처에만 '즐거운 작당' '연남동 만화왕' '청춘문화싸롱' 등 새로운 만화방들이 작년부터 속속 들어서고 있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만화방
    서울 마포구에 있는 만화방 ‘즐거운 작당’을 찾은 손님들이 만화책을 보고 있다(위). 손님들은 만화방 내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기도 하고(오른쪽), 편하게 누울 수 있는 다락방을 찾기도 한다.(왼쪽) /고운호 객원기자

    손님은 주로 낮에 몰려

    최근 찾아가 본 서울 강남구 가로수길 만화방 '섬'에는 이층 침대와 1인용 쿠션 소파가 모두 차 있었다. 약 125㎡(37평) 넓이에 해변 느낌이 나도록 파란색으로 디자인한 '섬'의 피크타임은 오후 4시다. 오승민(33) 사장은 "평일보다는 주말에, 밤보다는 낮에 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다른 만화방도 비슷하다. 평일 기준 100명 정도의 손님이 오는데 오후 1~5시 사이에 손님이 몰린다고 한다.

    3시간 동안 웹툰 단행본 '밤을 걷는 선비'를 읽었다는 이수진(22·대학생)씨는 "가로수길 온 김에 예쁜 만화방이 있다고 해서 와봤다"며 "낮에 딱히 갈 만한 곳이 없어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이제 저녁을 먹으러 갈 예정"이라고 했다.

    고급 만화방의 가격은 시간당 2500~3000원이다. 1000원 안팎인 일반 만화방보다 훨씬 비싸다. 그런데도 하루 평균 100~300명 정도 손님이 꾸준히 몰린다. 서가 모퉁이마다 꽃을 달고 아기자기한 캐릭터 인형과 피규어들로 내부를 장식한 인테리어가 남다르고 간식거리도 직접 만든 머핀이나 빙수 등으로 다양해졌다.

    이런 특성 때문에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공간을 선호하는 20~30대 여성 손님이 많다. 허수영(28) 청춘문화싸롱 대표는 "여자 손님 비율이 70% 정도"라며 "남자 손님은 대부분 여자친구와 함께 오고, 혼자 오거나 동성 친구끼리 오는 손님은 거의 다 여자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여성 손님을 고려한 공간은 만화방 주인들의 경험에서 나왔다. '카페 데 코믹스' 박일열(31)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집 앞 동네 만화방에 출석도장을 찍던 만화광이었다. 성인이 돼서도 종종 만화방을 찾던 박 대표의 만화 사랑은 연애를 하면서 난관에 부딪혔다. 그는 "여자 친구가 답답하고 냄새 나는 만화방에 오래 있으려 하지 않았다"며 "그때 여자들도 좋아할 만한 만화방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카페 데 코믹스는 테이블 사이에 칸막이를 둬 독립적인 공간에서 만화책을 볼 수 있게 했고 연한 갈색톤으로 숲 분위기를 냈다. 만화방 안에서 고양이 여러 마리를 키우는 것도 주요 콘셉트 중 하나다.

    홍대 앞 만화방 중 가장 큰 규모(약 330㎡)를 자랑하는 '즐거운 작당'은 다락방 같은 공간이 특징이다. 복층 구조 계단 아래쪽에 약 6.6㎡(2평) 크기의 공간 10개를 만들었다. 김민정(44) 사장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내 방 침대에서 온종일 뒹굴뒹굴거리며 만화책을 돌려보던 기억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래도 핵심은 만화책

    아늑한 쉼터 같은 만화방이라 해도 결국 고급 만화방의 핵심은 만화책이다. 많게는 1만권의 만화책을 갖추고 신간 업데이트도 꼬박꼬박 한다. "요즘 재밌는 책 뭐예요?"라는 요청에 손님 취향을 물어가며 추천해주는 것도 예전 만화방 정서를 빼닮았다.

    만화방 주인들이 공통으로 꼽은 인기 만화책은 '원피스'와 '나루토'. 모두 1990년대 말부터 연재를 시작한 만화책이다. '미생' '밤을 걷는 선비' '오렌지 마말레이드' 등 웹툰을 단행본으로 만든 만화도 꾸준히 잘 읽히고 '꽃보다 남자'나 '후르츠 바스켓' 등 젊은 여성들의 학창 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만화책들도 인기 있다.

    고급 만화방의 주요 고객층은 색다른 데이트 장소를 찾는 20·30대 커플들이다. 조아라(28·회사원)씨는 지난 여름휴가 때 남자 친구와 함께 하루종일 '즐거운 작당'에서 시간을 보냈다. 구석진 다락방에서 '원피스' 20여권을 쌓아놓고 페이지를 훑었다. 조씨는 "중학생 시절 재미있게 봤던 만화인데 몇 권까지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처음부터 다시 넘겨봤다"고 했다.

    편하게 쉴 수 있기 때문에 오는 사람들도 있다. '청춘문화싸롱'에서 만난 정윤선(26·회사원)씨는 경기도 부천에서 놀러 와 3시간짜리 이용권을 끊었다. 다리 뻗고 쉴 수 있는 곳을 찾아왔다는 정씨는 딱히 만화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쉬려고 왔다고 했다. 이곳 허수영 대표는 "만화책은 읽지 않고 그냥 누워서 자거나 쉬다 가는 분들도 있다"고 했다.

    만화방의 고급화 바람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만화방 컨설팅 업체 애니팝은 "만화책 납품을 문의하는 예전과는 달리 최근에는 고급 만화방을 염두에 두고 인테리어까지 함께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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