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키 큰 세 여자’의 김수연, 박정자, 손숙.

"아까처럼 날 그렇게 버려두면 안 되지. 넘어져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90대 할머니 'A'가 마구 소리를 지르자 50대 간병인 'B'가 받는다. "넘어지셨으면 제가 소리를 들었을 거고, 돌아가셨으면 어차피 죽었는데 무슨 상관이겠어요?" A가 갑자기 꺼이꺼이 흐느껴 울자 B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이제 후련하냐"고 묻는다.

명불허전에 용호상박이었다. 연극 '키 큰 세 여자'(에드워드 올비 작, 이병훈 연출)에서 A를 맡은 배우는 박정자, B는 손숙이다. 두 명배우는 마치 창과 방패, 소리꾼과 고수처럼 호흡이 착착 들어맞는 연기를 보였다. 박정자는 심술궂은 목소리 속에 천진난만한 장난기를 갖춘 모습을 보이다가 어느 순간 위엄과 우아함을 갖춘 캐릭터로 변신했다. 손숙은 무덤덤하고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수시로 톡 쏘며 야단치는 역할이 자연스러웠다. 20대 여자 'C'로 나오는 김수연은 이들에게 압도당하는 듯했으나 뒤로 갈수록 차츰 제자리를 찾아갔다.

연극은 시공간을 뛰어넘으며 맥락 없이 펼쳐지는 환자 A의 진술에 B와 C가 대응하며 정신없이 전개되다가 2막에선 세 여자가 한 인물의 다른 연령대로 바뀌어 서로 대화하는 독특한 구조다. 인생의 온갖 왜곡된 기억들이 파편처럼 쏟아지다가 실개천이 대하(大河)로 흐르는 듯 장엄하게 정리된다.

"지금이 좋은 건 이제 안 겪어도 되는 게 많아서 그런 거야"(B) "축복받은 마지막 순간엔 나 자신을 제삼자 입장에서 차분히 바라볼 수 있지"(A)라는 대사들이 무게를 지니고 다가온다. 무대 위에 올라가 살고 싶어지는 박동우의 무대 디자인도 탁월했다.

▷25일까지 명동예술극장, 공연 시간 120분,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