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식 요리사 이연복(56)은 30년 전 후각을 잃었다. 주한 대만대사관 주방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본국에 업무차 들어가던 대사가 그가 축농증이 심한 걸 알고 “대만에 가서 수술을 받아보면 어떻겠냐”고 권했다. 수술 후 축농증은 나았지만, 그의 코는 냄새를 잡아내지 못하게 됐다. 나아지겠거니 했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여전했다. 냄새를 못 맡으니 사과와 양파가 같은 맛으로 느껴졌다. 모든 게 끝났다는 절망감이 엄습했다.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짜장면 배달부터 시작한 인생이었다. 주방을 떠난 삶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낭떠러지에서 그는 다시 일어섰다. “내겐 아직 혀가 남아 있다. 나의 모든 미각을 혀에 집중하자.” 미각을 지키기 위한 ‘3대 철칙’이 생겼다.
“아침밥을 안 먹는다. 배가 부르면 미각이 둔해져 점심 준비에 차질이 생기니까. 담배도 끊었다. 입이 텁텁해진다. 저녁때 폭음하지 않는다. 혀가 둔해지기 때문이다.”
지난 29일 서울 연희동 중식 레스토랑 ‘목란(木蘭)’에서 이연복을 만났다. 그는 “후각을 제대로 갖고 있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며 “잃어버린 후각이 나를 더욱 절실하게 연구하고 고민하게 했다”고 말했다.
13세에 짜장면 배달로 시작한 중화요리 인생
요즘 가장 유명한 요리사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연복은 새로운 중화요리 바람을 일으켰다는 평가도 받는다. ‘중식계의 신사’라고도 불린다. 그가 ‘쿡방(요리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불과 15분 만에 번듯하게 만들어내는 중화요리에 시청자들은 감탄한다. TV 프로그램, 짜장 라면 CF에 나오더니 요즘엔 홈쇼핑까지 진출했다. 그의 이름을 내건 칠리 새우는 방송 두 달 만에 매출 80억원을 기록했다.
29일 오후, 점심과 저녁 사이 휴식 시간인데도 그는 손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젊은 여성팬이 함께 사진을 찍자며 다가오고, 식사가 끝난 단체 손님들이 돌아가며 악수를 청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지난달에는 자서전 ‘사부의 요리’(웅진지식하우스)도 냈다.
이연복은 1959년 서울 왕십리에서 태어났다. 친가와 외가는 모두 화교 출신. 외할아버지가 중국음식점을 했다. 그는 명동의 한성화교소학교에 다니다가 6학년 2학기부터 학교를 그만두고 중국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3남2녀의 학자금을 대기에는 빠듯했던 살림 탓이었다. 짜장면 배달통이 철가방이 아니라 목(木)가방이던 시절이었다. 이연복이 아버지 지인의 식당에서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받은 첫 월급이 3000원이었다.
어깨너머로 배운 요리였으나 타고난 감(感)이 좋았다. 1979년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중식당인 사보이호텔 ‘호화대반점’에 들어갔다. 스물두 살에 주한 대만대사관 주방장에 뽑혔다. 최연소 기록이다. 큰 기대 없이 원서를 내고, 40∼50대 요리사 50여명과 경쟁해서 합격했다.
흔히 대사관 주방에는 요리사가 여러 명 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대만대사관의 주방에선 주방장인 이연복과 설거지 담당 여성 직원까지 딱 두 명이 일했다. 주방장이자 유일한 조리 인력이던 이연복은 모든 요리를 도맡아 했다. 올림픽 대표팀 초청 만찬 정도는 돼야 추가로 외부 사람을 불러 썼다.
적어도 두 명은 더 있어야 제대로 돌아갈 주방을 이연복 혼자 맡아 메뉴를 짜냈다. 대사 부부가 매일 먹는 식사라도 요리 6가지에 메인 식사, 디저트로 이어지는 메뉴를 매일 다르게 내야 했다. 인터넷은 존재하지 않던 때였으니 혼자 연구하며 머리를 쥐어짰다. 온갖 재료를 섞어보고 바꿔보고 귀동냥도 했다. 그러다 보니 20인의 저녁 식사 정도는 너끈히 해낼 수 있게 됐다.
동갑 아내 이은실씨를 그 무렵 만났다. 서울 토박이로 5남2녀의 막내딸인 아내는 처음에 그가 요리사인 줄 몰랐다. 그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 별로 대우받지 못했던 요리사란 직업을 숨기고 싶었던 이연복은 혹시 양파 냄새라도 날까 싶어 데이트할 때면 몸에 파스를 붙이고 나갔다. 결혼식은 살림을 차리고 10년 후에야 올렸다. 아내는 지금은 못 만드는 중국 요리가 없는 어엿한 요리사다. 아내가 “내 팔자에 중국집 아줌마가 될 줄이야”라고 타박하면 이연복이 “나 만나서 출세한 줄 알아”라고 받아친다.
-요리를 처음 배울 때 무엇을 가장 중요시했나.
"지금 생각해보면 사소한 것부터 미치도록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기초를 익히는 것은 무림(武林)에서 실력을 쌓는 것과 같다. 어떤 날은 수없이 칼질만 하고, 또 어떤 날은 수없이 반죽만 하면서 내공을 쌓아야 한다."
-최연소로 대사관 주방장에 뽑힌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13세부터 시작했으니 22세라 해도 사실은 10년차 요리사였다. 경력은 되는데 나이가 어려서, 면접 보던 대사 부인이 같이 일하기 편할 것이라고 판단한 게 아니었을까."
대사관에서 고군분투하던 이연복은 8년 근무를 접고 1988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격무에 지쳐 있던 그의 주변엔 술 친구만 꼬이는 데다, 오사카에 사는 지인이 “너 정도 실력이면 여기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해서 결행했다.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건너간 그곳에서 10년간 중식당을 했다.
그는 한때 주먹깨나 쓰는 싸움꾼이었다. 비쩍 마른 데다 혈기방장한 그의 눈에 살기가 돈다고들 했다. 대만 대사가 거울 보고 웃는 연습을 하라고 권할 정도였다. 좁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다 보니 요리사들에겐 스트레스가 누적돼 있다. 게다가 주방에는 언제든 흉기로 쓸 수 있는 도구가 널려 있다. ‘욱’하고 치밀어 오르면 앞뒤 안 가리고 덤비던 이연복은 동료를 병원에 실려가게 하는 사고도 몇 번 저질렀다.
일본 생활 10년이 그를 바꿨다. “일본에 가니 어딜 가나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세요), ‘아리가또 고자이마시다’(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손님이 안 보일 때까지 허리를 굽힌 채로 인사했다. 어쩔 수 없이 따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진정성이 생겼다.” 이연복은 “마지못해 하던 인사도 10년을 채우니 마음에 스며들었다”며 “한국에 다시 오니 저절로 인사가 나오고, 다들 ‘연복이 달라졌다’며 반겼다”고 말했다.
후각을 잃고 진짜 요리사가 되다
1998년 귀국한 그는 역삼동에 중식당 ‘목란’을 열었다. 디즈니 영화 ‘뮬란’의 여주인공 이름이 화목란(花木蘭), 즉 뮬란이다. 이연복은 가족을 위해 남장(男裝)을 하고 전장(戰場)에 나간 뮬란의 모습에서 13세에 돈 벌겠다고 짜장면 배달에 나선 자신을 봤다.
식당 이름 ‘목란’은 가족을 위하는 그의 의지가 담겼다. 건물 임차료가 오를 때마다 역삼동, 압구정동, 평동을 거치다 2013년 10월 현재의 연희동에 자리 잡았다. 현재 목란은 98석이다. 이달 말까지는 점심과 저녁 예약이 전부 찼다.
목란은 그가 스타 셰프가 되기 전부터 유명한 음식점이었다. 대표 메뉴는 동파육이다. 송나라 문장가 소동파(蘇東坡)가 돼지고기에 간장, 생강, 파를 넣어 오랜 시간 조려 만들었다는 삼겹살 요리다. 이연복 표 동파육은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일품이라는 평을 받는다.
이연복은 “불 조절이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너무 오래 삶으면 뭉개지고, 짧게 삶으면 녹아내리는 비계의 맛을 음미하기 어렵다. 그 중간, 최적의 타이밍에 맞춰야 한다. 생강이 향이 강하다고 조금만 넣으면 비계의 누린 맛을 없앨 수 없으니 양 조절 또한 중요하다. 깊은맛은 간장이 맡는다. 이연복은 중국산을 쓴다. 넓디넓은 중국에 간장만도 수천 가지. 그중 무엇을 고르느냐도 맛을 좌우한다.
처음 방송에 출연한 것은 2002년 월드컵 때였다. 그때만 해도 요리사가 아니라 음식 그 자체가 주인공이었다. 최근 1~2년 사이 요리사가 주목받는 쿡방이 뜨면서 무거운 웍(둥글고 우묵한 중식 프라이팬)을 바람개비 돌리듯이 다루는 그에게 시선이 몰렸다.
-스타 요리사가 되니 매출이 많이 늘었나.
"매출은 늘었지만 스트레스도 비례한다. '저 사람이 만들어주면 확실히 맛있을 것'이라는 기대치가 높다. 예약을 두 달 전에 해야 하니 기다리면서 기대치가 더 올라간다. '얼마나 맛있는지 보자'는 분도 있다. 열 명 중 한두 명은 '뭘 이 정도를 갖고 그러지' 라고도 하고."
-요리사가 주방을 지키지 않고 방송에 몰두하느냐는 시각도 있는데.
"양식과 한식은 방송에 많이 노출됐는데 중식은 상대적으로 밀렸다. 그러다 보니 중식에 대한 오해도 있고. 중식도 집에서도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나갔는데, 하다 보니 점점 사명감이 강해져서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됐다."
-방송은 시선을 잡기 위해 조리 장면을 과장하거나 왜곡할 수 있지 않나.
"그런 부분이 크다. 작가나 피디들이 요구하기도 한다. 저는 굳이 보여주는 거에 집착하지 말고 솔직하게 하자고 한다. 촬영 인원이 50명은 되는데, 속임수 썼다가는 금방 들통나지 않겠는가."
-'목란'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맛집이다. 방송에 신경 쓰다 보면 음식 맛이 흔들릴 수 있는 거 아닌가.
"중요한 건 제가 직접 챙긴다. 예를 들어 만두 속처럼 핵심적인 것은 제가 직접 한다. 인터넷 평도 유심히 본다. 지적받은 부분은 꼼꼼히 살핀다. 가끔 동종업계 사람이 시기해서 쓴 건 웃어넘기고."
그가 만두 속을 ‘핵심’이라 한 것은 만두가 그의 음식 철학을 보여주는 메뉴이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메뉴부터 정성과 실력을 보여주면 손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철학이다. 많은 중식당이 만두를 재료상에서 구입해 주방에서 튀겨낸다. 만두는 돈을 받지 않는 공짜 서비스 메뉴라는 인식이 강해 굳이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 따로 돈을 받지 않고 내놓기 때문에 수준이 높아지지 않는 한식당의 김치와 비슷한 처지다.
이연복은 홀대받는 만두에 자존심을 걸었다. 일일이 손으로 싸서(중식에서는 만두를 ‘빚는다’고 하지 않고 ‘싼다’고 한다) 주문받은 후에야 튀겨냈다. 손님들이 만두에 열광해 하루에 900개씩 팔려나갔다. 8개에 9000원으로 공짜로 주는 다른 집에 비하면 고가(高價)인데도 없어서 못 판다. 하지만 만두만 싸고 있을 수가 없어 예약제로 돌리고 요즘에는 하루 400개 한정으로 판다. 식당이 들어설 건물의 ‘목’을 따지지 않는 것도 만두로 다져진 자신감이 바탕이다. 지난달 추석 연휴에 일본에 가서도 유명한 만두집을 돌아다니며 연구했다.
-만두를 왜 그리 중시하나.
“1998년 귀국해서 중식당 만두를 먹어 보니 ‘이걸 만두라고 할 수 있나’ 싶었다. 돈 받고 제대로 만들어서 팔겠다고 생각했다. 만두는 모두가 찾는 메뉴 아닌가. 쉽고 대중적인 메뉴부터 정성을 보여줘서 손님을 사로잡으면 될 거라고 봤다. 만두 싸느라 고생하지만 만두 때문에 편하게 웃을 수 있다. 만두는 밉고도 고운 연인 같다.”
-목란의 만두를 '평범하지만 최고의 맛'이라고들 하는데. 특별한 비법이 있나.
"만두소 핵심은 채소다. 내가 만드는 만두는 일본식이 가미돼, 양배추 비율이 70%쯤 된다. 잘 다져진 채소에서 즙이 우러나와 고기와 어우러져 촉촉하다. 여기에 청양 고추도 잘게 다져 넣어 매콤함을 더했다."
요리사 중에는 자신만의 철학을 고수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연복은 대세와 대중에 대한 감각이 유연하다. “유행의 흐름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만두조차도 한때 접은 적이 있다. 압구정동 시절이었다. 맛이 좋은데도 반응이 없자 대신 춘권을 했다. “아무리 요리사 입에 맛있어도 손님이 좋아하지 않는데 계속 만드는 건 아집”이라고 말했다.
-요리사가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꾸준히 음식을 낼 필요도 있지 않나.
"'맛있다'는 기준은 변한다. 동파육도 안 먹히던 때가 있다. 고집 피우지 말고 사람들 입맛에 맞춰주는 것이 중요하다. 가게 운영은 자존심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손해를 봐서는 안 된다."
-음식에는 간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입맛 따라 천차만별인 간을 어떻게 조율하나.
"간이 안 맞는 것은 욕심을 내서 그렇다. 완벽한 간을 찾지 않으면 된다. 손님 10명 중 8∼9명을 만족하게 하는 게 목표다. '10'이 진짜 맛있는 맛일 때, 9∼10 정도의 맛에 맞춘다."
기름 많고 느끼하다고? 짜장면은 억울해
-한국인에게 중식은 한식만큼이나 친숙하다. 중식의 요리 종류가 몇 가지나 되나.
"4만 가지 정도라고 한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해야 2000가지 정도다.
-중국 요리는 세계 어딜 가나 있다. 적응력이 뛰어나고 변형이 쉬운 요리인데, 어떤 점 때문인가.
"재료에 대한 편견이 없다. 뭐든 다 먹고 다 활용하지 않나. 그 많은 사람 식성에 따라 개발된 요리가 엄청나게 많은데, 그걸 다시 변형해서 새로운 걸 또 만들어낸다. 중식 요리사는 본인이 노력만 하면 어디 가서든 어떤 음식이든 만들어서 살아남을 수 있다."
-흔히 중식은 불맛이라고 하는데.
"오해다. 식자재 본연의 맛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순식간에 빨리 만들어낼 뿐, 강한 불에 그을렸다고 맛이 나지 않는다. 대량의 재료를 볶을 때가 아니라면, 가정에서 2~3분 정도는 보통 불로 만들어도 충분하다."
-탕수육 소스를 부어 먹는 게 나은지, 찍어 먹는 게 나은지('부먹찍먹') 논쟁도 있는데.
"소스를 어떻게 먹느냐는 맛을 좌우하지 않는다. 탕수육을 잘 튀겨내면 부어 먹든 찍어 먹든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이연복의 탕수육은 소스가 부어져서 나온다. 소스를 붓고 한 시간이 지나도 바삭하다고 소문을 탔다. 반죽에 비밀이 있다. 식용유를 넣는 것이다, 튀길 때 반죽에 들었던 식용유가 빠져나가면서 공기층이 생겨 바삭해진다. 반죽의 점도도 잘 맞춰야 하는데, 손으로 만져봐서 마요네즈처럼 느껴지는 질감이면 적당하다고 귀띔했다.
-방송에서 조리법을 공개하는 편이다. 자충수가 아닌가.
"음식에는 발명이 없다. 원래 있던 것의 업그레이드만 있다. 공개해서 다른 이들이 개량하고, 저는 그걸 뛰어넘을 무언가를 연구하면서 나아지는 거 아닌가. 긴장도 계속 유지하고. 일부 업자들이 '그런 조리법을 다 얘기해주면 우리는 뭘 먹고 사느냐'고 하던데, 그거 하나 가르쳐줬다고 굶어 죽을 실력이면 말 다한 것 아닌가."
-CF와 홈쇼핑에도 나간다, 홈쇼핑은 질(質)에 대한 타협 없이 수익을 내기 어렵지 않나.
"홈쇼핑도 중식 대중화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했다. 목란이 예약이 안 돼 못 먹어봐서 아쉽다는 분들이 많았다. 계약서에 제가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만든다는 조항을 넣었다. 아내가 집에서 바로 시켜보고 문제가 있으면 다시 출시한다."
-대중성을 중시하다 지금껏 쌓아온 이미지에 해를 입을 수도 있지 않을까.
"레스토랑 요리와 홈쇼핑은 가격이 다르니 아무래도 같은 맛일 수는 없다. 저렴하게 목란 음식에 대한 대리만족에는 성공했다는 분들이 많으니 그것으로 만족한다."
뛰어난 요리사는 ‘염치를 아는 사람’
목란에서는 지난봄 ‘칼 수여식’이 있었다. 정식으로 인정한 제자 두 명에게 쓰던 칼을 물려줬다. ‘목란’에 이틀 출근하고도 ‘목란에서 일했다’고 이력서에 적는 요리 지망생이 늘어나 정식 제자를 따로 두기로 했다.
-제자를 고를 때 어떤 점을 가장 중점적으로 봤나.
"음식 실력은 기본이고, 주방을 통솔할 시야가 넓은지를 봤다. 무엇보다 건방을 떠는지 아닌지를 우선으로 본다. 기술이 쌓일수록 겸손해야 발전이 있다. 건방은 맛을 망치고 결국 식당을 망하게 할 수도 있다."
건방이 싫다고 한참 설명하던 그는 ‘최고’도 싫다고 했다. “너도나도 ‘최고’를 꼽는 것이 싫다. 최고의 맛은 없다. 숫자로 정확하게 정해지는 올림픽 기록도 언젠가는 깨지는데 ‘1등의 맛’ ‘최고의 맛’이 어떻게 있을 수 있나.”
-어떤 사람이 뛰어난 요리사인가.
"염치를 아는 사람이다. 염치는 겸손한 마음, 베풀 줄 아는 마음이다. 친구들끼리 가면, 10번 중 한 번은 돈을 낼 줄 알아야 하는데, 늘 얻어먹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 염치없이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식당을 하면 당장 눈앞의 이익만 챙긴다. 장사가 조금만 안 된다 싶어도 재료비를 제일 먼저 줄인다. 오징어 두 개를 넣다가 하나로 줄인다. 장사가 안될 때, 2개 넣던 요리에 4개를 넣을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요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