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 칼럼] 나라를 입으로 지키나

조선일보
  • 선우정 국제부장
    입력 2015.09.23 03:20

    외교장관이 말했다 "韓·美 동맹은 천하무적"
    이번 위기 때 그 동맹에서 한국의 크기는 얼마였나
    '一擊의 능력' 없이 통일 협력을 꿈꾸지 말라

    선우정 국제부장 사진
    선우정 국제부장

    지난 4월 마크 리퍼트 미국 대사의 불국사 방문을 동행했다. 그가 테러를 당한 지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대사 뒤를 졸졸 따르던 꼬마들이 점점 불어나 석가탑 부근에서 결국 경호 라인까지 무너뜨렸다. 위력으로 떼어놓을 수 없는 아이들이다. 경호원들은 난감해 했지만 리퍼트 대사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밀려드는 꼬마들을 쓰다듬었다. 그때 어떤 꼬마가 외쳤다. "유에스에이!" 다른 꼬마들도 큰소리로 가세했다. "유에스에이!" "유에스에이!". 염불 대신 '친미(親美) 구호'가 천년 고찰에 울려 퍼졌다.

    한 달 뒤 리퍼트 대사는 한국 국민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대사관저 문을 개방했다. 서울 중구가 개최한 '정동야행' 축제의 백미로 화제를 모았다. 높은 깃대에 성조기가 상쾌하게 펄럭였다. 그곳에서 한 가지 궁금증을 풀었다. 덕수궁 중명전이 관저에서 매우 가깝게 보인다는 것이다. 관저 내 구(舊) 미국 공사관 건물에서 불과 2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고종은 덕수궁 화재 후 소실되지 않은 중명전을 집무실로 사용했다. 고종은 창덕궁이나 경복궁을 놔두고 왜 미국 공사관(현재의 대사관) 코앞에 집무실을 차렸을까.

    미 대사관저는 자주 오해를 받는다. 대국(大國)의 공관이라고 남의 궁궐까지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경기여고터, 예원학교 자리까지 궁궐이었으니 옛 지도를 보면 덕수궁 안에 해외 공관이 들어선 특이한 구도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시간의 앞뒤를 바꾼 왜곡이다. 공관이 궁궐을 파고든 게 아니라 궁궐이 증축을 통해 공관을 감싸 안았기 때문이다. 궁궐에 일부러 미국을 끌어넣은 것이다. 그만큼 일본이 무서웠던 모양이다. 중명전과 공관 건물의 짧은 거리는 고종이 느낀 두려움의 강도를 역설적으로 나타낸다.

    당시 미국 공사(현재 대사) 호러스 알렌은 고종의 친미(親美) 자세에 감동했다. 알렌은 리퍼트 대사만큼 한국에 호의적이었고 백성의 사랑도 받았다. 그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한반도에서 일본을 견제해야 한다고 백악관을 설득했다.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자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시어도어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은 반문했다. "당신은 왜 패할 나라를 지지하라고 하는가." '자신을 위해 일격(一擊)도 가하지 못한 나라를 위해 미국은 개입할 수 없다'는 유명한 문구를 남긴 것도 그즈음이다. 을사조약은 결국 중명전에서 성립됐다. 알렌 공사는 사전에 경질됐다. 조약이 성립되자 새 미국 공사는 일본에 축하 인사를 남기고 바로 짐을 챙겼다.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이렇게 묘사했다. "미국은 작별 인사도 없이,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한국을 가장 먼저 버렸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생각한 국익은 남의 손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南下)를 막고 미국은 어부지리로 중국에서 이익을 챙기는 것이었다. 이때 일본이 대신 피를 흘려주겠다고 손들었다. 중국의 동진(東進)을 견제하기 위해 피를 흘려주겠다며 안보법을 고친 지금 일본과 닮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일격을 가할 수 있는' 나라란 것도 비슷하다. 미국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 일본을 전쟁터에 끌어냈고, 일본을 끌어내기 위해 한국을 버렸다. 당시 한국은 '일격을 가할 능력'은 물론 독립을 유지할 어떤 방법도 없었다.

    지금은 능력이 없다고 국가가 버림받는 시대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일격의 능력' 없이 외교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건 허락되지 않는다. 지난달 남북 위기는 그런 능력의 시험대였다. 북한 잠수함이 절반 이상 사라지고 후방 화력이 전진 배치됐을 때 한국은 어떤 일격의 카드를 내세웠나. 천안함, 연평도 사건을 겪은 한국은 무엇이 달라졌나. 결국 이번에도 스텔스, 폭격기, 핵항공모함 등 미국의 전략 자산을 꺼내 들었다. 미·중·일은 적나라하게 그런 한국을 보았다. 통일 외교를 주장하려면 먼저 통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일격도 가하지 못하는' 나라를 위해 강대국이 개입하지 않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이번 위기에 대해 큰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한·미 동맹을 "천하무적"이라고 말한 윤병세 외교장관의 처신이 그런 인식을 반영한다. 이번 군사 위기에서 한국이 차지한 자리는 얼마나 컸나. 일격의 능력을 갖추고 그런 소리를 해야 실없이 들리지 않는다.

    나라는 입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장병들에 대한 대통령의 1박2일 특별휴가증 부여도 비슷하다. 장병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휴가증보다 적의 공격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일격의 능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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