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맘이 뜬다

90년대 8학군 '압구정 키드'… 이젠 유행 이끄는 '판교맘'

요즘 명품·유통업계에선 이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일하기 어렵다고들 말한다. ‘판교맘’ 얘기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백현동·삼현동·운준동·하산운동 일대에 조성된 판교신도시와 분당 지역에 걸쳐 거주하는 엄마를 새롭게 일컫는 단어인 ‘판교맘’.
이들이 최근 뉴스와 유행의 중심에 떠올랐다.

90년대 8학군 '압구정 키드'… 이젠 유행 이끄는 '판교맘'

입력 2015.09.13 07:10

경제력과 정보력으로 무장… 이슈를 선도하는 수퍼 파워

“한때 압구정 키즈였고 8학군에서 자란 이들이 많다. 자녀 교육을 위한 새로운 학교, 더 넓은 집을 찾아 강남에서 판교로 넘어간 이들이 적지 않은 만큼 소비 수준은 강남권을 뛰어넘는다.”(S사 포커스그룹 인터뷰 보고서 중)

“정보에 진짜 빨라요. 웬만한 신생 브랜드, 새롭게 뜨는 장소는 이미 다 꿰고 있고요, 해외여행 경험이 풍부해서 국내에 없는 브랜드까지 빠삭하게 알고 있는 이들이 90% 이상입니다.”(화장품 회사 용카 박문경 부장)

홍보 대행사 컴플리트케이 김지영 이사는 “올해 상반기 라이프 스타일 트렌드는 판교맘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식음료·리빙 트렌드는 이들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달 21일 문을 연 현대백화점 판교점의 식품관 풍경, 뉴욕에서 건너왔다는 한 컵케이크 가게 앞에 수십명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업계에선 "맛집이나 새롭게 뜨는 장소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판교맘의 심리를 정확하게 읽어낸 덕분에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고 평한다. /현대백화점 제공

압구정 키즈, 엄마가 되다… ‘판교맘 파워’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에 사는 주부 백지예(34)씨는 스스로를 ‘판교맘’이라고 자랑스럽게 칭하는 사람 중 하나다. 어릴 때부터 서울 압구정동에서 살면서 학창 시절 대부분을 강남에서 지냈다. 서울에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뉴욕에서 디자인스쿨을 다녔다. 결혼 후 신혼살림은 서초동에 차렸으나 임신 직후인 2011년 성남시로 이사했다.

2009년 개교한 혁신 학교인 보평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내고 싶어 일찌감치 판교 근처에 터를 잡은 것이다.

백씨는 “낯선 곳으로 이사를 오긴 했지만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강남 출신 엄마들이 워낙 많고, 생활 습관이나 취미도 비슷해서 전혀 외롭지 않다”고 말했다. 백씨의 가장 큰 낙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놓고 또래 엄마 친구들과 브런치 모임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육아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그는 “요즘 뜬다는 카페나 레스토랑은 이미 다 가봤다”고 말했다.

지난 21일 판교에 새로 매장을 낸 현대백화점이 작성한 라이프 스타일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판교맘은 대개 30·40대 기혼 여성으로 취학 자녀를 두고 있고, 한 달 소득은 300만원에서 1000만원 정도이다. 육아와 미용에 관심이 높고, 최신 유행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또 퍼트리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경제력이 있고 소비 수준이 상당히 높은 엄마들이 많다는 분석인 셈이다.

실제로 이들을 잘 공략하면 ‘기록’이 나온다. 2013년 유명 식당이 몰려 있는 쇼핑몰 판교 아브뉴프랑이 들어서자마자 ‘명소’로 자리매김했고, 현대백화점 판교점은 개점 직후 3 일 동안 181억원을 벌었다. 22일 토요일엔 하루 매출만 45억원이었다. 백화점으론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는 부산의 신세계 센텀시티 개점 첫 토요일 매출(34억원)을 넘어선 것이다. 업계에선 현대백화점이 미국 뉴욕에서 건너왔다는 컵케이크 가게 ‘매그놀리아’와 뉴욕 유명 식료품 매장 ‘이털리(eataly)’, 부산에서 유명한 ‘삼진어묵’ 등을 들여온 것이 식음료 트렌드에 예민한 판교맘을 움직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해석한다. 현대백화점 이경훈 대리는 “실제로 식음료 매출이 무척 높았고, 반응이 가장 뜨거웠다. 지난 3일 동안 50만명이 왔고, 이 중 실제 제품을 산 고객은 20만명 정도다. 매출 목표의 20%를 넘어섰다”고 말했다.

[강남 뛰어넘는 소비 수준]
최신 유행 잘 받아들이고
특히 식음료 트렌드에 민감

[그들은 왜 판교를 택했나]
자녀 교육시킬 학교 찾다가
집 평수 넓히려 강남 떠나
집값 뛰며 경제력 상승

[판교맘의 또다른 특징]
전통적 명품보다 낮선 브랜드 선호
교육열만큼 사회 문제도 관심 높아

IT 첨단 기술, 부동산 호황이 빚어낸 경제력

유통회사 S사가 판교 지역에 새 매장을 낼 것을 대비, 작년 초에 판교맘 200여명의 이야기를 듣고 만들었다는 포커스그룹 인터뷰 보고서를 보면 이들의 소비 파워를 빚어내는 ‘주머니’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지속적인 부동산 매매가 상승의 수혜를 입은 이들이 많음.’ ‘IT 기업들이 대거 판교에 몰려들어 테크노밸리를 형성하면서 도시 부흥을 맞았고 소득이 함께 올라감.’ 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다.

실제로 판교는 광교·동탄·김포 한강·파주 운정 등을 포함한 2기 신도시 중에서도 2006년 첫 아파트 분양을 시작한 이래 매매가가 가장 크게 상승한 지역으로 꼽힌다. 부동산 포털 닥터 아파트에 따르면 2006년부터 2014년까지 판교 지역 아파트는 분양가 대비 매매가 상승률이 63.7%였다.

2005년 시작된 삼평동 일대 판교테크노밸리의 부흥도 이 도시 거주민들의 경제력 상승에 한몫했다는 평이 많다. SK플래닛, 다음카카오, NHN 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해 넥슨, 네오위즈, 넵튠, 아이엠컴퍼니 등이 판교에 모여 있다. 판교맘 황여울(42)씨는 “남편이 IT 회사에 다녀서 2006년 말에 판교로 옮겨왔는데, 아파트 가격도 계속 오르고 남편 회사 월급까지 계속 올라줘서 이사를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큰손’으로 불리는 판교맘도 차츰 늘어났다. 한 프랑스 명품 회사 홍보 담당 A씨는 “작년 VIP 고객 행사 때 명품 리뷰를 전문으로 쓰는 파워 블로거 20여명을 불렀는데 그중 판교에 산다는 엄마가 7명이었다”고 했다.

최근엔 두 럭셔리 파워 블로거의 사적(私的)인 다툼이 알려지면서 일부 ‘판교맘’의 화려한 라이프 스타일이 새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은 평소 함께 다니며 명품을 구입하고 블로그에 이에 대한 리뷰를 쓰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 중 한 명이 판교에 거주하는 기혼 여성이었다. 주부들 사이에선 이 두 사람의 일상이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둘의 사이는 그러나 결국 틀어졌고 서로를 공격하기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블로그에 남긴 글이 뜻밖에도 한 유명 방송 진행자의 불륜 논란을 널리 알리는 단초가 됐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인터넷 주부 커뮤니티는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고, 몇몇 네티즌들은 이 사건을 ‘판교 대첩’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판교라는 지명이 유명세를 탔다.

럭셔리맘, 인포맘, 앵그리맘

판교맘이라고 무조건 지갑을 덜컥 여는 건 아니다. 홍보 대행사 더스프링 최승주 대표는 “고객 분석을 해보면 이들은 해외 직구에 능하고, 세일 정보, 신상품 정보에도 발 빠르다. 가격 정보에도 예민하다. 누구나 아는 전통적인 명품 브랜드보다는 남들이 잘 모르는 새로운 브랜드에 더 호기심을 보이는 편이다”고 말했다. ‘용카’ ‘닥터딥’ 같은 생소한 화장품이 백화점에 입점하자마자 판교 엄마들이 바로 몰렸던 것도 이들의 쇼핑 정보력이 남다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한 명품 회사 이사는 “까르띠에, 샤넬 같은 최고급 명품 매장이 판교에 아직 들어서지 않았던 것도 사실 비슷한 이치다. 판교맘들은 신선하고 낯선 브랜드에 더 관심이 많다는 분석이 있다”고 말했다.

자녀 교육열이 높은 만큼 공동체 문제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많이 보이는 것도 판교맘의 또 다른 특징이다. 회원 수가 8만7000여명에 이르는 ‘분당판교따라잡기’라는 카페에선 아이 학원 정보를 묻는 질문만큼이나 ‘반찬 품앗이’ ‘놀이 품앗이’를 하자는 소모임 모집 글이 종종 올라온다. 살림에 지친 기혼 여성들이 함께 반찬을 나누거나 함께 아이를 놀리며 서로를 응원하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작년 8월 국회 앞에서 세월호특별법 반대 시위를 했던 ‘앵그리맘’ 중 상당수가 ‘판교맘’ 이름을 달고 나오기도 했다. 박은정 분당판교따라잡기 카페 대표는 “우리나라 사회문제에 누구보다 자기 일처럼 목소리를 내는 것이 또한 판교맘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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