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이 간다] "어릴적 꿈은 접었지만… 조상 뵐 면목은 세워"

    입력 : 2015.08.18 03:00 | 수정 : 2015.08.18 09:14

    [해남 尹氏 종손 형식씨]

    피랍 형 대신 65년간 宗家 지켜… 孤山·恭齋 낳고 茶山 살핀 名家
    고산유고 국역·지암일기 번역, 서영大 열고 명가 교류도 시작

    문갑식 선임기자
    문갑식 선임기자
    명가(名家) 해남 윤씨가 전남 강진에서 본관을 옮겨온 게 12세조 어초은(漁樵隱)공 윤효정(尹孝貞·1476~1543) 때다. 그는 거부 정호장(鄭戶長)의 외동딸과 결혼해 전 재산을 물려받았는데 당대에 적선지가(積善之家)로 집안을 일으켰다. 가난한 이를 살리고 세금을 대납해 죄인을 감옥에서 풀어주는 개옥문(開獄門)의 덕을 세 차례 베풀었다. 선행을 베풀어서인지 가문은 번창했다.

    '한국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고산 윤선도(1587~1671)는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됐다. 그 증손자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가히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할 인물로, 스스로 그린 초상화가 국보 제240호다. 해남 윤씨 집안은 전라도 해안선을 바꾼 간척 사업을 수대 이어온 '개척 가문'이기도 하다.

    해남 윤씨의 종가 녹우당(綠雨堂)에 선비의 멋이 살아있다. 집 뒤 비자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비 오는 것처럼 '쏴~' 소리를 낸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녹우당은 효종이 사부인 고산(孤山)에게 선물한 서울 명동 집을 배로 옮겨와 세운 것이다.

    예부터 이 일대를 둘러본 풍수사들은 이 천하 명당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해발 381m 덕음산(德陰山)을 등에 지고 사방에 대문장가 후손들이 나온다는 문필봉(文筆峰)이 솟아있고 앞의 너른 들에 모든 물이 모이니 재산이 마르지 않는 형국이다.

    녹우당(綠雨堂) 툇마루에 앉은 해남 윤씨 종손 윤형식.
    녹우당(綠雨堂) 툇마루에 앉은 해남 윤씨 종손 윤형식. 그가 명문가 종손으로서 단조롭지만 굵직한 삶의 뒷얘기를 풀어놓았다. /이서현씨 제공
    하릴없는 관광객의 등쌀에 지쳐 굳게 닫아놓은 녹우당 대문을 두드려 65년간 집을 지키고 있는 종손 윤형식(尹炯植·82) 선생과 마주했는데 하필 전날 고산의 제사를 치렀다고 했다. 차남이었던 이 종손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상흔(傷痕)과 맞물려 격동했다. 그의 형이 이철승(李哲承·93)과 전국학생연맹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6·25 때 인민군에 피랍돼 실종된 것이다. 서울고와 연세대 영문과를 나와 문학과 유학(留學)을 꿈꾸던 그의 두 어깨에 '해남 윤씨 가문'의 운명이 고스란히 짐 지어진 것이다.

    "꿈을 이룰 순 없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제 대(代)에 고산유고를 국역해냈고 지암일기를 10년째 번역하고 있습니다. 공재유고와 낙서공(공재의 아들) 기록도 정리 중이고요. 퇴계 종가 같은 다른 명문 집안들과 모임도 만들었고요. 이렇게 선조들의 기록을 후세에 남기고 가문끼리 교류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지요."

    제사 치르느라 지쳤던 몸을 일으켜세우자 선생의 눈빛이 초상화에서 본 공재의 그것과 닮아보였다. 때론 "그렇게 역사를 몰라서야…"라고 후학을 탓하면서 가문을 지탱해온 단조롭지만 굵직해보이는 삶을 하나하나 풀어놓는 것이었다.

    "역대 대통령들이 우리 가문을 많이 살폈지요. 박근혜 대통령이 문학관을 지어주셨는데 오픈을 못 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의 유물기념관을, 김대중 대통령은…." 그러다 윤 선생의 이야기는 녹우당 바로 밑 충헌각(忠憲閣)에 얽힌 사연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저 터가 도올 김용옥의 증조부가 머물던 곳이지요. 김병사라고, 창덕궁 수비 책임자였는데 임오군란 때 난을 일으킨 병사들을 피해 명성황후를 업어서 구출한 분입니다. 후환을 피해 우리 가문에 의탁했는데 도올의 아버지 대에 신학문을 한 뒤 충청도로 옮겨갔어요. 도올의 형까지는 우리 가문 족보에 남아있지요."

    그런가하면 지금은 없어진 흑백사진 한장에서 다산 정약용의 자취가 나왔다. "다산이 머물던 초가(草家)지요. 아시다시피 다산의 어머니가 해남 윤씨인데 다산이 유배왔을 때 여기 기거하다 강진으로 옮겨가 제자 기르고 방대한 저술을 했습니다."

    역사에는 기쁨만 있는 게 아니고 분노도 있는 모양이다. 선생은 돌연 흥분했다. "고산 할아버지 때부터 간척 사업을 해와서 지금도 섬 주민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줍니다. 그런데 5년 전에 군수와 도의회 의장이 작당해 고산 사당을 헐어버렸어요." 나중에 알고 항의했더니 항몽(抗蒙)했던 배중손 장군 사당을 대신 지었다는 해명과 함께 "앞으로 제사를 같이 지내드릴 테니 노여움을 푸시라"고 했다는 것이다. 선생은 "주민들이 지은 사당도 유적인데 지방행정의 수준이 이렇다"며 혀를 찼다.

    덕음산에 빽빽한 대나무-비자나무 숲에도 사연이 있다. "원래 산에 바위가 많아요. 바위 많은 산 주변은 주민들이 굶는답니다. 어른들로부터 '나무 많이 심어 바위를 가리라'는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이제는 안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렵다는 주민도 없고."

    어찌 바위뿐이랴, 서영대 이사장인 선생은 광주 서영대에 이어 2013년 파주 캠퍼스를 열었다. 이화여대가 이전하려다 포기한 땅이다. "파주 캠퍼스에 우수한 학생이 많이와요. 육영(育英)도 실패하지 않았으니 조상들 뵐 면목은 세운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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