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희 서울대 일본연구소장 겸 국제대학원 교수

8월 14일 발표된 아베 담화는 4개 핵심 문구를 짜깁기해 넣었지만 우리의 기대를 만족시키기에는 미흡했다. 러·일전쟁이 식민지 지배에 놓여 있던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강변하면서, 정작 일본이 강제 병합한 한국의 식민지화 과정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일본은 지난 전쟁에 대해 거듭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해 왔다며 간접화법으로만 사죄했다. 전쟁의 고통을 감내한 중국인들의 관용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다. 전쟁과 무관한 다음 세대들에게 사과를 계속하는 숙명을 지워서는 안 된다며 사과 피로증을 드러냈다. 과거사에 대한 거듭된 사과와 반성을 주장하는 일본 내 좌파와 거리를 두려 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베는 역대 내각의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림 없이' 계승하겠다고 강조했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시대의 대세를 잘못 보고 국제질서의 도전자가 되어 전쟁에 돌입했다는 '국책의 오류'를 인정하고, 다시는 국제분쟁의 해결수단으로서 무력의 위협이나 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부전(不戰)의 결의'를 새롭게 했다. 위안부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그늘에는 심하게 명예와 존엄에 상처를 받은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과거의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과거를 이어가 다음 세대에 넘겨줄 책임이 있다고 다짐했다. 침략과 반성, 사죄를 거부하는 일본 우익들과 명확히 거리를 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아베 담화에는 아쉬운 점이 적지 않지만,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하겠다는 아베의 입장에 주목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 등 구체적 행동으로 이를 증명하라고 화답했다. 역사문제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고 과거사 현안 처리와 안보, 경제, 사회문화 협력을 구분하는 투트랙 전략을 계속하겠다는 정부의 실용주의 노선은 실사구시의 태도라고 본다.

만약 한국이 이 시점에서 아베 담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강경한 비판론만 앞장세운다면 아베가 피해가려던 일본 내 우익들을 자극하고 그들에게 다시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최근 아베에 대한 일본 국내 불만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또다시 일본 내 불만 여론의 화살이 한국을 향하지 않도록 하는 세심한 대응이 요구된다.

아베 담화에는 중국과 타협하고 대화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담겨 있다. 중·일관계를 파국에 빠뜨리지 않으려는 양국의 노력도 가시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아베 관저에는 중·일이 타협하면 한국도 고립을 면하기 위해 일본에 손을 내밀 것이라는 환상과 같은 믿음이 있다. 아베의 꼼수에 등 떠밀려 한국 외교의 진로를 뒷북치듯 선택하는 파국은 피해야 한다.

한국이 보다 전략적인 주도권을 행사하여 동북아 외교를 견인해 나갈 때다. 한·중·일 3국 정상회담 실현을 염두에 두고 전승절을 이용해 중국을 방문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단, 한국전쟁에 참가했던 중국군 열병식 참석은 피하는 게 좋겠다. 일본에 앞서 중국과의 관계를 심화하고, 미국 방문을 통해 한·미동맹을 재확인한 바탕 위에서, 한·중·일 정상회담과 한·일 정상회담을 열어 동북아 평화와 안전을 한국이 만들어간다는 전략이 하반기 한국외교의 지향점이어야 한다.

이제는 한·일 현안인 위안부 문제도 우리가 주도적인 해결을 도모할 때가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47명밖에 안 남았다. 평균 연령이 89세다. 일본이 외면한다고 기다리지 말고, 양국이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합당한 해결책을 적극적으로 찾아보아야 후세에 한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마치 대화를 피하고 일본이 먼저 손을 내밀기만 기다리고 있다는 인상을 국제사회에 주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