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서대문형무소'의 前 일본 총리

조선일보
  • 김태익 논설위원
    입력 2015.08.14 03:00

    일왕(日王)의 항복 선언을 몇 시간 앞둔 1945년 8월 15일 오전 조선총독부 2인자 엔도 정무총감은 조선인 지도자 여운형을 만났다. 일제 패망 후 일본인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 치안 유지를 부탁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여운형이 내건 조건이 있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정치범·사상범을 석방하라." 다음 날 서대문형무소에서 죄수복 입은 민족 지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마중나온 시민들과 얼싸안고 한 몸이 돼 종로를 누볐다. 해방의 기쁨은 맨 먼저 서대문형무소로부터 왔다. 우리에겐 그만큼 한이 깊은 곳이다.

    ▶600년 전 조선 왕조가 한양을 수도로 정할 때 무학 대사가 서대문형무소 자리를 내려다보며 했다는 말이 있다. "명당은 명당이나 홀아비 3000명이 탄식할 곳이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세워졌다. 을사늑약과 군대 해산으로 불붙은 의병 운동을 탄압하려고 일제가 만든 최초의 근대식 형무소였다. 이강년·허위·이인영 같은 의병장 57명이 이곳에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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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들어서는 사이토 조선 총독을 저격한 강우규 의사를 비롯해 김구·김동삼·안창호·한용운·손병희·양기탁·이승훈 같은 민족 지사들이 고초를 겪었다. '105인 사건'으로 15년 형을 받았던 김구는 이때 수갑 찬 자리에 생긴 흉터가 평생 지워지지 않았다. 그가 민초들과 함께하겠다며 호를 '백범(白凡)'이라 지은 곳도 이곳이었다.

    ▶열일곱 살 소녀 류관순은 3·1 만세를 주도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는 옥중에서 아침저녁 만세를 열창하다 죽도록 매를 맞았다. 모래 섞인 밥으로 영양실조에 걸린 데다 심한 고문까지 받다가 끝내 눈감았다. 하토야마 전(前) 일본 총리가 그제 옛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순국선열 추모비에 무릎 꿇었다. "이곳에 수용돼 고문받고 목숨 잃은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했다. 땡볕 아래 정장 차림에 검은 넥타이 맨 채 신발까지 벗고 무릎 꿇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정계 주류에서 물러난 '전직(前職)'이라지만 일본 내에서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을 염두에 두었다면 이렇게 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 브란트 총리는 1970년 바르샤바 유대인 봉기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빗물 고인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 꿇고 독일의 전쟁 범죄를 사죄했다.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하토야마씨 사죄는 일본 내 양식을 가진 이들의 마음을 전한 것이라 믿고 싶다. 70년 되도록 이렇게 못 하는 아베 정권과 일본의 몰상식한 극단 세력이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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