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기업인 14명과 영세·중소 상공인을 포함한 6527명을 특별사면했다. 교통법규 위반으로 운전면허 취소·정지 처분이나 벌점을 받은 220만명은 제재를 특별 감면(減免)해 줬다.
이번 사면은 정부가 나름대로 기준과 원칙을 정해 사면 대상자를 골랐다는 점이 눈에 띈다. 기업인의 경우 최근 6개월 내 형(刑)이 확정됐거나 5년 내 특사를 받은 사람, 죄질(罪質)이 나쁜 사람을 배제했다. 이 기준에 따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이미 두 차례 특사를 받은 적이 있어 제외됐다. 1800억원대 기업어음 사기죄로 기소된 구자원 전 LIG 회장과 두 아들은 피해자가 많고 피해 변제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 대상에서 빠졌다.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도 전과 다른 점이다. 과거엔 정권마다 정치인과 대통령 측근, 고위 공직자들을 국민 대통합이라는 핑계로 특사 대상에 끼워 넣었다. 아무 기준 없이 자의적으로 대상자를 정하곤 했기 때문에 기업인·정치인들이 대통령 주변에 특사 대상에 넣어달라고 로비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대법원 확정 판결 후 나흘 만에 사면된 사람도 있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국민 정서와 배치되는 특별사면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해왔다. 이번에 재벌 총수 사면을 최소화하고 정치인을 배제한 것은 그런 뜻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어쨌든 범죄를 저질러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들을 사면한 것은 법치주의 훼손이라는 근본적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아무리 서민을 위한 조치라도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정지된 사람을 구제해 주면 '교통법규는 안 지켜도 그만'이라는 인식을 갖게 할 수 있다.
사면의 기준과 원칙을 대통령의 재량(裁量)에만 맡기는 것은 문제다. 어느 정권이든 정치적 이해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기준과 원칙을 바꿔 사면권을 남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실형(實刑)을 선고받은 사람은 석방 이후 5년이 지나야만 전과 기록을 없애는 사면을 받을 수 있다. 프랑스는 테러 범죄, 부정부패 공직자, 선거 사범, 15세 미만 미성년자 폭행범은 아예 사면을 받을 수 없다. 우리도 특사(特赦) 기준을 대통령 뜻에만 맡길 게 아니라 법으로 정해 놓아 사면의 남발과 악용 소지를 줄여야 한다. 법원이 테러나 아동 폭행, 공직자 뇌물 등 반(反)사회적 범죄에 대해서는 가석방이나 감형(減刑)을 금지하는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관련 조항을 신설할 필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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