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와 소련의 냉전 없었다면 지금껏 한국 분단도 없었을것"

입력 2015.08.13 03:00 | 수정 2015.08.13 03:25

[대한민국을 낳은 국제회의] [3]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그라이너 獨냉전사연구소장

베른트 그라이너 독일 냉전사연구소장
미·소 냉전사 연구 권위자인 베른트 그라이너(63·사진) 독일 냉전사연구소장은 "포츠담회담 이후 미·소 냉전이 시작되고 한국의 분단으로 이어졌다"면서 "냉전이 없었다면 한국의 지속적 분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지난 6월 10일 베를린 연구실에서 인터뷰했다.

-연합국 수뇌 회담이 나치 독일 항복 이후 두 달이나 지나서야 열린 이유는.

"트루먼이 원자폭탄 개발 이후로 회담을 미뤘다는 견해가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없어 확증할 수 없다. 독일이 그렇게 빨리 항복할 줄 몰랐던 측면이 크다. 안전·보안 문제라는 실무적 이유가 있었다."

-소련의 대일전(對日戰) 참가는 왜 늦어졌나.

"소련의 주적(主敵)은 독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독일의 항복이었다. 대독전(對獨戰)에 군사력을 집중하다 보니 여유가 없었다."

-미국이 핵무기를 확보한 것은 소련을 견제할 목적이 있었고, 냉전의 시작이라는 의견이 있다.

"미국은 핵무기를 '로열스트레이트플러시(포커에서 가장 높은 패)'로 여겼다. 일본의 항복뿐 아니라 소련 팽창도 막을 수 있는 무기로 여긴 것이다. 원폭 개발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원폭 투하 이후 미국과 소련은 서로 신뢰하지 못하게 됐다. 냉전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다. 당시만 해도 독일의 미래는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독일 분단이 없었다면 냉전이 시작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일본은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폭이 떨어졌을 때도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천황제가 유지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츠담선언에는 천황제 자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천황은 신(神)적 존재이기 때문에 천황제 폐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난 5월 20일 아베 총리는 "포츠담선언을 인정하느냐"는 야당 의원 질문에 "논평을 보류하겠다"면서 부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역사를 수정하려는 시도는 다른 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런 시도가 정당하다는 말은 아니다. 과거 범죄에 대해 투명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독일도 1950~60년대에는 피해를 보았다는 의식이 강했다. 70년대 이후 홀로코스트 역사를 알게 되면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회 다수가 가담한 범행이란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시민 교육이 중요하다."


공동기획: 대한민국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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