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 '대구 여대생 성폭행 사망' 스리랑카人 또 무죄

입력 2015.08.11 11:59 | 수정 2015.08.11 13:46

지난 17년 동안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온 ‘대구 여대생(정은희·당시18세) 성폭행 사망’ 사건이 결국 영구 미제(永久未濟)로 남게 될 것으로 보인다.

대구고법 형사1부(재판장 이범균)는 11일 특수강도강간 등의 혐의로 기소된 스리랑카인 K(48)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이 무죄를 선고했다. 범인으로 지목됐던 K씨가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되면서 숨진 여대생 정양과 그동안 딸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정양 아버지의 원한(怨恨)도 풀 수 없게 됐다.

항소심 재판부 역시 1심과 마찬가지로 K씨의 범행을 증언한 증인들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오래 전 벌어진 일이고, 증인들이 직접 사건을 목격한 게 아니라 K씨와 공범으로 이미 스리랑카로 귀국한 B씨로부터 전해들은 진술(전문진술)이어서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항소심 과정에서 검찰은 술에 취한 공범 B씨로부터 범행 사실을 들었다는 새로운 증인 A씨까지 내세웠지만 법원 판단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구 여대생 사망사건 일지
재판부는 “항소심에서 새로 등장한 증인 A씨가 16년이 지난 올해 검찰에서 K씨 등 공범3명이 정씨를 강간한 순서와 방법, 사고 당시 정씨 옷차림과 행동, 소지품 등 세부적인 내용까지 세세히 기억해 진술한 것은 내용이 충격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구체적이고 상세해 믿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A씨의 증언은 교통사고 현장의 객관적 상황과도 일치 하지 않는다”며 “A씨 뿐만 아니라 나머지 증인 2명이 B씨로부터 들었다는 범행 내용은 단지 전해들은 전문진술에 불과해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증인들의 증언을 증거로 삼더라도 K씨 등 3명이 피해자 정씨를 성폭행하고 책·현금·학생증을 강취했다는 범죄 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정씨 팬티에서 발견된 K씨 유전자형과 상당히 일치하는 정액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K씨가 정씨를 강간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정씨가 다른 2명의 공범과 함께 정씨를 성폭행하고, 책 등을 강취했다는 특수강도강간 혐의까지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K씨 정액이 묻은 정씨 팬티는 K씨의 단순 강간 혐의를 입증할 물증은 될 수 있을 것으로 봤지만 이 죄는 이미 공소시효(10년)가 지난 상황이다.

‘대구 여대생 의문사’ 사건은 17년 전인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0월 17일 새벽 5시10분, 계명대 간호학과에 다니던 정은희(당시 18세)씨가 대구 구마고속도로에서 23t 화물트럭에 치여 숨진 채 발견됐다. 불과 여섯시간 전 정씨는 대학 축제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셨고, 경찰은 이 사고를 단순 교통사고사로 종결했다.

하지만 정씨 사망에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 속옷이 없었다. 뒤늦게 사고 현장 근처 가드레일에서 속옷이 발견되자 유족들은 단순 사고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은 “아줌마나 입는 속옷”이라며 유족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부터 정씨 아버지는 생업을 포기한 채 딸의 한(恨)을 풀기 위해 사건에만 매달렸다.
1998년 숨진 대구 여대생 정은희씨의 아버지 정현조씨.
정씨 아버지는 청와대, 법무부 등에 탄원서를 내고, 직무유기 혐의로 고소도 했다. 그의 끈질긴 노력 끝에 검찰은 15년만인 2013년 재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사건의 유일한 단서였던 정씨 속옷에서 검출된 남성의 DNA를 근거로 수사를 시작했고, 이를 강력범죄자 DNA자료와 대조했다. 2011년 여고생과 성매매를 하려다 붙잡힌 스리랑카인 K씨의 DNA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

검찰은 3개월가량 추적한 끝에 대구에서 외국인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K씨를 검거했다. 당시 K씨와 함께 일하던 동료들로부터 “K씨와 다른 2명이 자전거에 여자를 태우고 가는 것을 봤다”는 증언도 확보했다. 특수강도강간죄 공소시효(15년)를 불과 한달 앞둔 시점이었다.

검찰은 “K씨 등 스리랑카인 산업연수생 3명이 술에 취한 정씨를 강제로 자전거에 태워 고속도로 부근으로 끌고 가 성폭행한 뒤 가방에 든 현금과 책을 빼앗았다”며 K씨를 구속기소했다. K씨 공범 B·C씨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스리랑카로 출국한 상태였다. 검찰은 “정씨 속옷에서 검출된 DNA가 K씨의 DNA와 일치하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해 5월 대구지법은 K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증거 불충분이 이유였다. 검찰은 K씨 기소 당시 특수강도강간 혐의를 적용했다. 공소시효 때문이었다. 특수강간의 공소시효는 10년이지만 특수강도 혐의까지 적용하게 되면 공소시효는 15년으로 늘어난다. 검찰은 “K씨가 정씨를 강간한 뒤 가방의 책과 학생증, 현금 3000원 가량을 빼앗아갔다”며 특수강도 혐의도 함께 적용했다.

당시 검찰은 이미 스리랑카로 간 공범 B씨와 C씨에 대해 현지 조사를 진행해 “K씨가 범행을 저지르는 것을 봤다”는 진술도 확보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K씨와 공범이었지만 우리나라는 스리랑카와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지 않아 이들을 강제로 데려올 수는 없었다. B씨는 뒤늦게 자신의 진술을 뒤집기도 했다.

결국 1심 법원은 “‘정씨의 가방 속에 책이 들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공범 B씨의 전문진술(傳聞陳述)만으로 피고인이 정씨의 책을 뺏았다고 보기 어렵다”머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항소심 과정에 추가 증거 확보를 위해 사건 당시인 1998년 국내에 거주했던 스리랑카인 중 아직 국내 머물고 있는 34명을 전수 조사한 끝에 스리랑카인 A씨로부터 “K씨 공범 B씨한테 사건 내용을 자세히 들었다”는 새로운 증언을 확보했다.

공범 B씨는 술에 취한 채 친분이 있던 A씨에게 “어린 한국 여학생에게 몹쓸 짓을 했다. 가방을 뒤져 학생증과 책을 가져갔다. 학생증을 보고 나이가 너무 어려 놀랐고, 학생증에서 떼어낸 사진까지 보여줬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A씨는 지난 3월 항소심 법정에서 같은 내용을 증언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 증언도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항소심에서도 무죄가 내려지면서 이번 사건이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되지 않는 이상 영구 미제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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