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이 간다] 官이 관리 못하니… 民이라도 나서야죠

    입력 : 2015.08.04 03:00

    [광주광역시 '문화재 감시자' 이동호]

    광주U대회 외국인 대학생에 한국 亭子의 아름다움 알려
    "송강 '성산별곡' 탄생한 식영정… 亭子, 기생 품고 놀던 곳 아닌 공부하고 제자 길러내던 공간"

    문갑식 선임기자 사진
    문갑식 선임기자
    금발에 푸른 눈의 젊은이들이 정자(亭子)에 오른다. 몇백 년 묵은 기둥에 세월이 새겨놓은 흔적에 감탄하던 그들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미소 짓는다. 때맞춘 비에 으슬으슬하던 몸은 구들장의 온기가 덥혀주고 땀 범벅인 머리는 소나무 숲의 바람이 식혀준다.

    얼마 전 광주 유니버시아드에 출전한 외국 대학생들이 이곳에 왔다가 남도(南道)의 멋에 흠뻑 빠졌다. 무등산 자락에 널려 있는 정자와 원림(園林)은 그중에도 백미다. 그런데 그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이동호(李東浩·53)는 광주광역시의 정책에 불만이 많아 보였다.

    "제가 머무는 식영정(息影亭)을 30분 봐서 뭘 알겠어요? 한나절은 머물며 역사도 살피고 저 밖에 무성한 소나무 냄새도 맡고 차도 한잔 하면서 몸으로 느껴야지요. 이 외국 젊은이들이 훗날 그 나라 지도자가 될 텐데 고작 2억원이 없어 이렇게 축소됐답니다."

    이동호는 식영정 주변을 '일동삼경(一洞三景)'의 절경이라고 했다. 식영정·환벽정(環碧亭)·소쇄원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그는 광주시에 오래전부터 "U대회 때 이것을 전략 상품처럼 만들자"고 제안했다. 광주시는 "아이디어는 참 좋은데 돈이 없다"고 했다.

    이동호는 지역의 '문화재 감시자'다. 관청이 그를 눈엣가시처럼 보는 이유가 있다. 일례로 1560년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이 지은 식영정은 사위 겸 제자인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이 물려받았다가 나중에 송강(松江) 정철(鄭澈)에게 넘어간 정자다.

    광주광역시에서 활동하는 ‘문화재 지킴이’ 이동호씨가 지난달 열린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에 참가한 외국 선수들에게 한국 정자(亭子)를 설명하고 있다.
    광주광역시에서 활동하는 ‘문화재 지킴이’ 이동호씨가 지난달 열린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에 참가한 외국 선수들에게 한국 정자(亭子)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작가 이서현 제공

    "전라도 정자를 기생 품고 시(詩) 읊조리며 술 마시던 공간으로 알지요?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스스로 공부하고 제자를 길러내던 공간입니다. 송강이 여기서 '성산별곡' 같은 가사(歌辭) 문학의 명편을 낳았는데 주색잡기 했다면 그런 걸작이 나왔겠습니까?"

    이 식영정이 '관(官)의 무지'로 파괴됐다고 이동호는 말했다. "저 옆이 서하당입니다. 서하당은 소나무에 비친 석양이 자주색 안개처럼 깃드는 곳인데 거기 사당(祠堂)을 지어놨어요. 서하당은 아래쪽의 음습한 곳에 복원하고…. 평생 지켜보세요, 햇빛이 비치나."

    그렇다면 사당에는 누굴 모셔놓은 것일까. 이동호는 허탈한 웃음을 짓더니 "그냥 텅 빈 흉물"이라고 했다. "대체 누가 저기다 서하당을 지어 곰팡이투성이로 만들었는지…, 우리 혈세가 이렇게 줄줄 샙니다." 말문이 한 번 터지자 멈출 줄 몰랐다. "식영정 근처 소쇄원만 해도 그래요. 지금 소쇄원은 원래의 9분의 1로 줄어든 겁니다. 일제가 호남 인맥을 끊겠다고 신작로를 내서 지맥(地脈)을 뚝 잘라버렸어요. 이걸 복원하긴커녕 주차장으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이동호는 현재 소쇄원 주차장이 있는 자리에 황금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했다. 이는 조선 영조 31년, 즉 1755년 제작된 소쇄원 목판 탁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거기엔 10여채의 정자와 전체 면적이 1만평에 달한다는 사실이 명시돼 있다.

    소쇄원의 오곡문(五曲門)은 원래 장관이었다고 한다. 산에서 내려온 물살이 오곡문 밑으로 뚫린 물길을 타고 다섯 번 굽이쳤다. 그런데 이것도 전남교육연수원이 세워지면서 태풍이나 호우(豪雨) 때가 아니면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전남교육연수원이 산 위쪽에 파이프를 뚫어 물길을 자기들 쪽으로 돌린 겁니다. 제가 여러 번 말렸지만 소용없었어요. 자기들 물값 아끼겠다고 소쇄원을 말라붙게 했으니 정암 조광조 선생이나 소쇄공 양산보 선생 3대가 지하에서 통곡할 일입니다."

    그의 말처럼 소쇄원은 조광조와 연관이 있다. 기묘사화로 실각한 뒤 간신들 농간으로 근처 능주에 유배 와 한 달여 만에 사약을 마시고 죽자 제자 양산보(1503~1557)가 출세할 뜻을 버리고 글 읽고 후학 양성하는 장소로 소쇄원을 만든 것이다.

    이동호는 전남대를 세 번 다녔다. 공대와 인문대를 때려치운 뒤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그런데 직장생활은 하지 않고 호남 유학(儒學)에 매료돼 소쇄원(1994~2005), 식영정(2006~2010), 창평향교(2010~2014)를 거쳐 식영정으로 돌아와 그 원형을 찾고 보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대체 뭐 해 먹고살았느냐'고 했더니 그는 "곧 부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먹는 개량종 배추가 아닌 진짜 토종 배추를 복원했다는 것이다. '구라'인 줄 알았는데 그는 3년 묵은 김치를 꺼내왔다. 식영정 보며 먹는 묵은지 맛은 절품(絶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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