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주필

'그리스 폭풍'이 지나간 유럽에선 마이너스 금리가 확산되고 있다. 처음에는 은행이 중앙은행에 맡기는 예금에만 마이너스 금리가 적용되더니 지금은 고객들에게 적용되기 시작했다.

덴마크·포르투갈·스페인에서는 주택 자금 대출 이자율이 마이너스가 됐다. 대출금을 받아 쓰는 빚쟁이가 은행에서 이자를 받아간다는 말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기업이나 기관투자가가 거액 예금을 맡기면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는 국가는 다 헤아리기도 힘들다. 서민들 푼돈 저축에도 마이너스 이자율을 매기는 곳도 있다.

은행은 돈을 불려주는 곳이 아니라 예금 보관 명목으로 수수료를 내야 하는 기관으로 바뀌는 것일까. 일상생활에 침투하는 마이너스 금리는 은행의 배신이 아닐 수 없다.

정책 당국이 예금자에게 보내는 신호는 돈을 은행에 묵히지 말고 쇼핑하거나 여행하며 쓰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금자들이 손해를 감수할 이유는 없다. 스위스에서는 1000스위스프랑(121만원 수준)짜리 현찰을 인출해가는 조짐이 나타났다. 현찰은 금리 0% 자산 아닌가. 그러자 은행들이 고액권 인출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내가 내 돈을 찾을 권리도 없다는 말이냐는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는 추경을 편성하고 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까지 인하했지만 5분기 연속 0%대 성장률로 저성장 기록을 경신 중이다. 김대중 정부가 평균 4.8% 성장을 기록한 이래 노무현 정권 4.3%, 이명박 정권 3.2%로 저성장 기조가 착착 진행됐다. 어떤 대통령도, 어느 당도 성장 하락을 막지 못했다.

정부는 무능하고 정치는 무책임하다는 것은 지난 20년의 성장 추락으로 드러났다. 또다시 11조원 '찔끔 추경'으로 정책 당국과 정치권이 밑천을 드러낸 지금 경기가 풀리리라는 꿈은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결국 한국은행이 또다시 금리 인하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은 자기들 책임을 모면하고 무능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한국은행을 닦달할 것이다.

어쩌면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일본은행 총재가 요즘 종종 받는 질문에 부닥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마이너스 금리는 언제쯤 도입할 거요." 만약 미국이 연말 안에 금리를 올렸다가 다시 경제가 후퇴하면 서둘러 금리를 낮출 것이다. 그때쯤이면 미국도, 일본도, 유럽도 사실상 마이너스 금리 시대로 간다. 자본주의 수백년 역사에서 신천지(新天地)가 열린다. 거기서 한국만 예외라며 암벽 위 소나무처럼 버티기는 무척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경제는 유럽과 다르고 미국·일본과도 다르다. 원화는 국제통화로서 신분증을 받지 못해 아무리 돈을 풀고 금리를 내려도 환율이 저절로 올라가지 않는다. 선진국과 똑같은 정책으로 통화 전쟁에 뛰어들었다가 언제 외환 위기를 겪을지 모르는 자격 미달 신세다. 금융 완화가 곧 수출 증가, 경기 상승으로 이어지기 힘들다는 말이다.

선진국이라면 몰라도 한국서는 금리를 내린다고 해서 기업 투자와 소비가 늘어난다는 법칙이 증명된 적도 없다. 오히려 부동산 대출이 늘어 버블을 부추기곤 했다. 최경환 경제팀이 지난 1년 돈줄을 풀어 제친 결과 경기는 회복되지 않고 부동산 값이 뛰고 가계 부채만 초고속으로 급증하지 않았던가.

저금리·마이너스 금리는 무엇보다 중산층에 타격을 준다. 여유 자금으로 이자소득을 기대하는 주체는 주로 중산층이다. 저금리 아래서는 이 계층의 자산 소득이 급감할 수밖에 없다.

5월 말 현재 예금은행의 총예금은 1097조원이다. 지난 2년 사이 예금 금리는 평균 1%포인트 하락했다. 예금자들로서는 줄잡아 20조원 안팎의 이자소득이 줄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5000만 국민 1인당 40만원꼴이다. 경기 부양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위해 개인들이 그만큼 희생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반면 정부는 올해 100조원 안팎의 국채(國債)를 발행해 예금자들로부터 돈을 빌려 쓴다. 국채 이자율이 1% 하락하면 정부가 지불해야 할 이자는 대략 1조원 절감된다. 예금하는 예금자는 손해 보고 돈을 갖다 쓰고 정부와 기업은 혜택을 보는 게 저금리 체제다. 예금자들 소득이 정부·기업으로 자동 이전된다고 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저금리가 장기화되면 정부·기업이 중산층의 희생을 딛고 서 있다는 불만이 노출될 것이 뻔하다.

저성장 체질은 굳어졌다. 한국은행은 일단 금리를 더 낮출 수 있는지 짚어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저금리의 함정(陷穽)들도 잘 살펴봐야 한다. 이주열 총재는 그저 금리 인하가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버티며 "정부가 할 일을 해달라"고만 해서는 안 된다. 금리 인하 대신 재정의 역할을 늘려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재정을 조달해 어디에 집중 투입해야 경기 부양 효과가 있을지 말해야 한다. 언제나 힘없는 모습을 벗지 못하는 한국은행에 무리한 부탁일지 모른다. 하지만 조세 제도나 부실 기업 구조조정에 문제가 있으면 그것도 고치라고 소리를 질러야 한다.

대통령이나 최경환 경제팀에 대한 기대는 접는 것이 현명하다. 2년 반 인내하며 충분히 지켜보았다. 지금부터는 다음 정권을 향해, 그리고 국민을 상대로 발언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치에 끌려가지 말고 중앙은행이라도 제발, 정말 제발 경제를 진흙탕 수렁에서 끌어낼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래야 몇 년 뒤에라도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