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니가 고우영이나 강철수나 길창덕처럼 된다는 소리냐?"

"…."

"와 대답을 몬 하노. 니가 고우영이나 강철수나 길창덕처럼 된다는 소리냐고 안 물었나?"

1975년 3월 경남 진주. 25세 청년이 큰형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만화가 꿈을 이루기 위해 무작정 상경(上京)하겠노라 선언한 직후였다. 청년은 진주시청에서 도안사(圖案士)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월급은 1만5000원, 시청 총무과장 월급이 1만7000원이었으니 상당한 액수였다. 왜 불확실한 길을 가려 하느냐고 말리는 큰형에게 청년은 "만화가라고 해서 꼭 가난하게 사는 건 아니다. 고우영, 강철수, 길창덕은 집도 있고 자가용도 굴리고, 정말 잘산다"고 답했다. 그런데 형이 "네가 그들처럼 된다는 이야기냐"고 물어오자 데뷔조차 못 한 주제에 할 말이 없었다. 긴 침묵이 흐르자 형이 다시 물었다.

‘둘리’는 ‘둘(二)’이란 뜻이다. 김수정은 “원래는 ‘하나’라는 공룡과 ‘둘리’라는 공룡 두 마리가 나오는 이야기를 구상했는데, 다른 작가가 ‘보물섬’에 ‘하나’라는 캐릭터를 등장시키면서 애초의 계획을 접었다”며 “어법상 ‘두리’가 맞지만 ‘둘리’라는 이름이 좀 더 귀엽고 멍청한 이미지를 줘 ‘둘리’라는 이름을 택했다”고 말했다.

"니 우짤래?"

"그래도 올라갈 낍니다."

한참 말이 없더니 형이 입을 열었다.

"알아서 해라."

며칠 후 청년이 집을 떠날 때 형이 "차비에 보태라"며 쥐여 준 봉투에 5만원이 들어 있었다.

지난 14일 서울 도봉구 쌍문동 '둘리 뮤지엄'. 만화가 김수정(65)은 옛날이야기를 많이 했다. '아기 공룡 둘리'가 월간지 보물섬에 연재를 시작한 게 1983년이니 '둘리 아빠' 김수정이 '스타 만화가'로 유명세를 치른 지도 30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그에겐 승승장구한 기억보다 만화가로 입신양명하고자 분투한 기억이 더 짙은 듯했다. 청바지에 검정 티셔츠, 운동선수처럼 짧게 깎은 머리…. 60대 만화가는 청년 풍모로 인터뷰 장소에 등장했다.

심의가 낳은 '공룡'

오는 24일 문을 여는 둘리 뮤지엄은 도봉구가 2006년부터 추진해 온 어린이용 문화 시설이다. 총예산 176억원. 국비와 시비, 구비를 합쳐 지었다. 연면적 4151.43㎡(약 1255 평)에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로 만화 내용을 테마로 한 놀이 시설과 어린이 도서관을 갖췄다. 국산 만화 캐릭터를 내세운 박물관이 국내에 설립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왜 쌍문동에 '둘리 뮤지엄'이 들어서게 되는 건가.

"'아기 공룡 둘리'의 배경이 쌍문동이다. 내가 1975년 처음 서울에 올라와 자취할 때 살던 집이 쌍문동에 있었다. 그 집을 모델로 둘리가 얹혀사는 고길동씨네 집을 그렸다. 집 앞에 중랑천 줄기인 개천이 있었다. 빙하 속에 박제돼 있던 둘리가 서울로 떠내려와 쓰러져 있던 바로 그 개천이다."

―'둘리'는 어떻게 탄생했나.

"1982년 10월 창간된 만화 잡지 '보물섬'이 계기가 됐다. 허영만, 길창덕, 김형배, 김철호 등 그 당시 최고 만화가 18명으로 창간 멤버를 꾸렸다. 거기에 들어간 작가들은 '1진'이 되고 못 들어간 작가들은 '2진'으로 전락했다. 당시만 해도 나는 'B급 작가'로 분류돼 있었다. 그래서 '보물섬' 창간 시점에선 빠졌다가 나중에 합류하게 됐다."

―'둘리'가 처음부터 보물섬에 연재된 건 아니었다는 말인데.

"창간하고 몇 달 후 '보물섬'에 연재하던 친구 신영식이 '나 원고 가져다주러 보물섬 가는데 같이 갈래?' 하고 물었다. '보물섬' 구경도 할 겸, '혹시 나를 써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겸 해서 따라갔다. 신영식이 '보물섬' 편집자에게 나를 소개하자 편집자가 대뜸 '우리 잡지에 연재할 수 있겠느냐'고 하더라. 길창덕 선생님이 건강이 나빠져 연재를 중단하셨다고 했다. 기회가 왔으니 덥석 받았다."

―갑자기 연재 제안을 받았는데 내놓을 작품이 있었나.

"나는 항상 준비가 돼 있었다. 하자는 사람은 없었지만, 하고 싶은 건 많았기 때문이다. '둘리'는 몇 년 전부터 준비해 온 캐릭터였다. 캐릭터를 잡다 보니 '이 캐릭터는 아껴야겠다'는 필(feel)이 왔다. 그래서 다른 데도 연재할 기회가 있었는데 놓아두고 있었다. 내심 '보물섬'을 기대했는데 기대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해서 1983년 보물섬 4월호에 첫 연재를 했다. '대타'였지만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독자 엽서를 이용한 설문 결과를 통해 잡지에 실리는 모든 만화에 순위를 매기던 시절이었다. 첫 달 순위가 6위였다. 다음 달엔 3위, 그리고 그다음 달엔 1위를 차지했다. 이후로 '둘리'는 좀처럼 1위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왜 공룡을 주인공으로 삼았나.

"심의 때문이었다. 개구쟁이에 때론 어른들에게 불손한 언사를 하기도 하는, 있는 그대로인 어린이를 그려내고 싶었는데 그랬다간 심의에 걸릴 게 뻔했다. 동물을 주인공으로 해서 희화하자고 생각했다. 은유적 요소를 강화하기 위해 원시시대의 아이들을 그릴까도 생각했는데 박수동의 '고인돌'이 떠올라서 포기했다. 그래서 원시시대 동물을 현대로 가지고 오자고 결심한 거다."

―시종일관 둘리를 구박하는 고길동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었나.

"우리 시대의 아버지상을 담았다. 무뚝뚝하고 완고한 아버지다. 어린 시절 길동이를 미워했던 독자들이 '어른이 되니 길동이가 이해되었어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만화계의 김수현

'둘리'의 인기로 김수정은 '스타 만화가' 반열에 올랐다. 당시 그에게 붙은 별명이 '만화계의 김수현'이었다. '별그대'의 김수현이 아니라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다. 만화 평론가 박석환은 '아기 공룡 둘리'에 대해 "만화가 출판을 벗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 라이선싱 비즈니스를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실천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라고 평했다.

'둘리'는 1987년 처음 KBS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다. 이후 1995년 주식회사 '둘리나라'를 설립한 김수정이 직접 감독을 맡아 1996년 극장판 만화영화 '아기 공룡 둘리-얼음별 대모험'을 내놨다. 영화는 서울에서만 30만 관객을 동원하며 그해 한국 영화 랭킹 4위에 올랐다. 김수정은 2009년 '뉴 둘리'를 제작, SBS를 통해 방영했다.

―애니메이션 감독까지 직접 맡았다.

"1987년 KBS에서 방영한 '둘리' 애니메이션을 많은 사람이 좋아했지만 나는 좀 아쉬웠다. 캐릭터의 모양새라든가 연출 같은 것이 내가 볼 때엔 미진했다. 그래서 직접 극장판 영화를 만들게 됐다"

―돈은 많이 벌었나.

"관련 상품을 만들면 상품가의 5% 정도가 로열티로 들어온다. 그 돈을 거의 애니메이션 제작하는 데 투입했다. 2009년 '뉴 둘리' 제작에만 30억원이 들어갔다. 간신히 적자를 보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둘리뮤지엄' 1층 로비에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이 방영되고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원시시대로 간 둘리가 엄마를 만났다가 다시 헤어지는 에피소드다. 동행한 사진기자가 "어릴 때 저 장면을 보고 너무 슬퍼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왜 '둘리'를 엄마 잃은 공룡으로 설정했나.

"둘리뿐 아니라 또치(서커스단에서 탈출한 타조), 도우너(외계인) 모두 천애 고아다. 고길동의 조카 희동이도 부모가 유학 가면서 친척 집에 맡긴 경우다. 아이들이 말썽을 부리는 건 애정을 달라는 시위다. 애정 결핍에 걸린 아이들의 탈출구로서 거대한 어머니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이미 억만 년 전 옛날에 죽었지만 그를 찾아간다는 '꿈'이라도 필요하다고 여겼다."

만화가 되려 무작정 上京

김수정의 자화상

김수정은 11남매 중 여덟째다. 장작을 패서 내다 팔던 아버지는 김수정이 중학교 2학년 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부침개 장사를 했다. 소년 김수정은 시장에서 비닐 우산이며 아이스크림을 팔며 어머니를 도왔다. 그는 "가난 속에서 수많은 형제와 부대끼며 내가 꾸어왔던 꿈이 작품에 은연중에 묻어난다"고 말했다. 여섯 살 때 형을 따라 처음 가 본 만화방은 그에게 신세계를 열어줬다. 만화 속 이야기가 그렇게 신이 날 수 없었다. 그는 매일 만화를 그렸고, 자연스레 만화가를 꿈꾸게 됐다.

―1975년 상경한 건 단지 만화가가 되기 위해서였나.

"그렇다. 세 번째 상경이었다. 중학교 때 단돈 120원 들고 '만화가가 되겠다'며 무작정 상경했다. 고등학교 때는 만화 원고 한 권을 만들어서 올라왔다. 당시 톱클래스 만화가라던 김기백 선생을 찾아가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세 번째엔 원고 세 권을 만들어서 왔다. 대학도 졸업하고 군대도 다녀왔으니 예전보다는 요령이 생겼다. 작가를 찾아가기보다는 출판사 위주로 다니면서 원고를 들이밀었다."

―출판사에 원고를 들이미니 받아주던가.

"퇴짜를 많이 맞았다. 출판사 측은 상당히 절망적으로 봤다. 독학으로 만화를 익혀서 이야기 구성이나 그림이 세련되지 않고 촌티가 난다는 이유였다. 출판사에서 기성 작가를 사사해 추천받아 나오는 게 답이라고 하길래 동향인 만화가 강철수 선생을 찾아갔다. 강철수 선생은 원고를 좌르륵 보더니 '그림 40점, 스토리 60점, 평균 50점, 낙향하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 암담했다."

출판사와 유명 작가에게 거절당했지만 김수정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왕 서울에 왔으니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문제의 원고를 한국일보 신인 공모전에 '버리듯' 던져 넣고 보따리를 싸서 아예 완전히 올라와 버렸다. 두 달 후, 김수정 앞으로 전보 한 통이 날아왔다. '축 당선.' 그렇게 그는 만화가로 데뷔했다.

―필화(筆禍)도 겪었다는데.

"1980년 한 주간지에 '아담과 이브'라는 작품을 연재할 때였다. 당시 코미디언 이주일씨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하는 유행어가 인기였다. 이주일의 유행어를 패러디하면서, 주인공이 머리카락을 다 뽑아버리는 장면을 그렸는데 그게 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이던 전두환 얼굴과 똑같이 나온 거다. 난리가 났다. 그 잡지를 발행하던 일간지는 사과문까지 실었다. 그래서 연재를 그만두게 됐다. 거기뿐 아니라 다른 곳 연재도 잘렸다. 힘든 시기였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그때였나.

"나는 늘 힘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둘리 연재하던 80년대 초부터 90년대 중반까지가 가장 힘들었다. 만화가로서는 전성기였지만 내 인생에서는 최악이었다. 가정사가 극단으로 치달아 이혼까지 갔다. 당시 작품을 보면 신경이 곤두서 펜 선이 굉장히 날카롭다."

김수정은 1996년 파리 여행 중에 만나 재혼한 19세 연하 아내와 사이에 늦둥이 딸(12)을 두고 있다. 그는 "딸 덕에 아직도 아이 눈으로 세상을 본다. 한때는 죽기 위해 산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더 살 수 있을까' 생각한다"면서 "인생의 막판에 와서 삶에 다시 눈을 떴다"고 말했다.

―인생에 좌우명이 있나.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좌우명이 '최선을 다했는가'였다. 젊은 시절엔 그 좌우명을 듣고 '촌스럽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작업을 한 후 뒤를 돌아보며 '내가 이 작업에 최선을 다했는가' 묻게 되더라. 최선을 다한다는 일은 촌스럽고 단순하지만 한편으로 어렵다."

―앞으로 작품 활동 계획은.

"내 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요정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구상 중이다. 가제가 '요정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이다."

―당신에게 '둘리'란 뭔가.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까지 깊이 스며들어 같이 살고 있는 인물이다. 나는 둘리가 실제로 어딘가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