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호놀룰루 중부 칼리히 지역은 1950년대 개발된 개인주택 단지다. 입구에 들어서자 '쿨라 콜레아(Kula Kolea)'라는 길 이름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하와이 말로, 영어로는 '스쿨 코리아(한국 학교)'라는 뜻이다. 이승만이 세운 학교 '한인기독학원'이 있던 곳이다. 교사(校舍)는 사라졌지만 지명으로 흔적이 남았다. 지금은 칼리히 초등학교가 들어섰다. 이승만은 호놀룰루 시내와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이 한적한 언덕에 1923년 부지를 마련하고 5년 전 개교했던 한인기독학원을 이전했다. 1947년 폐교 때까지 300여명 졸업생을 배출했다. 학교 땅은 1950년과 1955년 두 차례에 걸쳐 나눠 팔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보내온 부지 매각 대금을 인천에 새로 설립한 공과대학에 투입했다. 현재 인하대다. 대학 이름은 인천과 하와이에서 첫 글자를 땄다.
이승만에게 하와이는 자유로운 독립 국가 대한민국 건국의 산실(産室)이었다. 이승만과 하와이의 인연은 111년 전으로 올라간다. 처음 하와이 땅을 밟은 때는 1904년 11월 29일. 석 달 전 한성(서울)감옥에서 풀려나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향하던 때였다. 중간 정박지인 하와이에 하루 머무는 동안 이승만은 배에서 내려 교민 200여명을 만나 예배를 보고 연설했다.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 내리교회 교인을 비롯한 54가구 가족이 제물포항을 떠나면서 시작됐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조건이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늘어나 1910년 인구조사에서 하와이 한인은 4533명으로 전체 인구 19만명 중 2.4%였다. 현재는 교민 4만명이 산다. 전체 인구는 140만명이다.
이승만은 서른여덟 살 때인 1913년 2월 3일 하와이에 본격 정착했다. 한인단체 국민회(당시 회장 박상하)가 초청했다. 한인이 많이 사는 하와이는 독립운동 근거지로 적합했다. 이승만은 1939년 워싱턴으로 옮길 때까지 25년간 하와이를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1960년 하야 후 5년을 더하면 아흔 생애의 3분의 1인 30년을 하와이에서 지냈다. '제2의 고향'인 셈이다. 1931년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하와이섬(빅 아일랜드) 힐로에 세운 동지촌 숯가마터를 제외하면 대부분 이승만의 자취는 호놀룰루가 있는 오아후섬에 있다.
푸우누이 거리 2453번지 주택은 이승만이 1913년 하와이에 도착해 살았던 첫 집이다. 현재는 개축을 해 그때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승만은 이 집에서 '한국교회핍박'이란 책을 썼다. 책 서문을 쓴 날짜가 1913년 3월로 되어 있어 하와이 도착 후 한 달여 만에 탈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책에는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일본이 조작한 '105인 사건'의 경위, 미국과 영국의 여론 등을 소개했다. 이승만은 한국이 교회를 통해 서양과 관계를 맺고 교회에서 독립 사상을 배양하기 때문에 일본이 한국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라고 역설하면서 일본의 탄압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통박했다.
푸우누이 집을 마주 보고 왼쪽 길로 200m쯤 올라가면 막다른 길이 나온다. 한인기독학원의 전신인 한인여학원 자리다. 지금은 오아후 컨트리클럽으로 편입됐다. 높지 않은 담 너머로 골프장 클럽하우스가 보인다. 한인여학원은 이승만이 하와이 여러 섬을 둘러보고 교민 여자아이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고 때로 본토인에게 팔려가는 일이 있는 것을 안타까워해 세운 학교다. 마우이섬 등에서 소녀들을 데려와 처음엔 여학생 기숙사를 만들었다가 여학교로 발전했다.
이승만은 하와이 도착 후 3년간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한인기숙학교(한인중앙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하와이주 청사 맞은편 펀치볼 스트리트 1133번지에는 한인기숙학교 터를 설명하는 표석이 있다. 표석 동판에는 '한인 이민자들이 기증한 2000달러를 종잣돈으로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가 1906년 세워 1918년까지 운영했다'는 설명을 새겼다. 지난해 교민들이 세운 것이다. 여기에 한인감리교회도 함께 있었다. '코리안 컴파운드(한국 단지)'라고 불린 이곳에서 이승만은 세계 정세를 알리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태평양 잡지'를 냈다. 태평양 잡지(1930년 이후 '태평양 주보')는 여러 차례 발행소를 옮기다가 1930년대에는 노스 킹 스트리트 동지회관에서 발행됐다.
명문 프린스턴대학 박사인 이승만의 인기와 명성은 대단했다. 하와이 지역 사회에서 미국인 박사도 드문 때였다. 1918년 하와이대학 종합대 승격 운동이 벌어질 때 서명한 지역 유지 483명 중 이승만은 유일한 박사였다. 이승만이 세운 여학교에서 배우려는 남학생 희망자도 많았다. 이승만은 1918년 남학생을 받아들이면서 8년제 남녀공학 한인기독학원으로 개교했다.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남녀공학"(이호 목사)이다. 한인기독학원은 쿨라 콜레아 부지로 이전하기 전까지 5년간 현재 알리올라니 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하와이에서 47년째 사는 이승만 연구자 이덕희씨는 한국 사회 일부의 '아니면 말고'식 이승만 공격에 대해 개탄했다. "이승만은 할 일이 있을 때마다 동포들에게 알리고 기금을 조성해 활동했어요. 교민들 돈을 가로채 사리사욕을 채웠다느니 하는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말입니다." 이씨는 서거 50주기를 맞아 출간한 '이승만의 하와이 30년'(북앤피플)에서 이승만이 직접 적은 회계 수첩, 하와이 등기소에서 찾은 이승만의 부동산 거래 내역 등을 발굴해 이를 꼼꼼히 분석했다. 이씨는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25년 동안 준비하며 얻은 노하우는 새로 세워진 대한민국의 12년을 이끌며 수립한 의무교육, 농지개혁 같은 정책에 반영됐다"고 말했다.
하와이는 모두 여덟 개 섬으로 이뤄져 있다. 이승만은 하와이 팔도(八島)를 조선 팔도(八道)에 비유하며 독립과 자유의 나라 대한민국을 꿈꿨다. '이 여덟 섬에 한인 아니 가 있는 곳이 없으니 가위 조선 팔도라. 장차 이 속에서 대조선을 만들어 낼 기초가 잡히기를 바랄지니 하나님이 십 년 전에 이리로 한인을 인도하신 것이 무심한 일이 아니 되기를 기약하겠도다.'('태평양 잡지' 1914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