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네!" "한 번 더 봐야겠다!" 2시간 40분의 공연이 끝나고 로비로 나온 관객들의 얼굴은 밝았다. 웃는 표정으로 여전히 눈물을 닦는 사람도 있었다. 3년의 준비 기간과 제작비 50억원을 들인 대형 창작 뮤지컬 '아리랑'(극본·연출 고선웅)이 지난주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원작(12권)의 방대한 분량을 감골댁(김성녀) 중심의 가족사로 압축시킨 이 작품은 1막에서 영화를 보는 듯 손에 땀을 쥐듯 숨 가쁘게 전개되더니, 2막에선 수많은 인물이 빚어내는 감정과 갈등을 거대한 파도처럼 쏟아냈고, 피날레에선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꾹꾹 눌러 담는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정서를 극적으로 표현했다. 간결한 무대와 효과적인 영상은 배우들의 동선을 돋보이게 했다.
시대는 1905년 을사늑약 직전부터 1920년대에 이르는 민족의 수난기(受難期). 사재를 털어 의병 항쟁에 나서는 양반 송수익(안재욱)과 머슴 출신의 일제 밀정 양치성(김우형)이 대립하고, 감골댁의 딸 수국(윤공주)과 마을 청년 득보(이창희)가 아픈 사랑을 나눈다. 일제 침략의 희생자가 된 주인공들은 만주로 이주해 저항을 이어가지만 독립군의 기반을 없애려는 일본군의 가혹한 탄압과 맞닥뜨리게 된다.
'진도 아리랑''신아리랑' 같은 아리랑의 중심 곡조는 한(恨)과 신명을 동시에 드러냈으며, '진달래와 사랑' '어떻게든' 같은 김대성 작곡의 삽입곡은 극의 서정성을 높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대하(大河)와도 같은 감정의 물줄기를 쏟아냈다. 득보의 여동생인 소리꾼 옥비(이소연)가 일본군 장교에게 능욕을 당하는 장면에선 뜻밖에도 김수영의 시 '풀'이 장엄한 합창으로 흘러나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 여기에 송수익의 외침이 더해진다. "죽지 말아! 심장을 두들기고 부아를 돋워서라도 살아남아! 우덜은 조선사람 아니냐, 옥비야!" 순간, 슬픔의 정서가 희망으로 승화됐다.
모든 배우가 독립운동을 하듯 결의에 찬 연기를 보였다. 김성녀는 극 전체의 중심을 잡았고, 안재욱은 지사적(志士的)인 풍모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국립창극단원 이소연은 작품의 독특함을 가장 잘 살린 배우였는데, 곳곳에서 토해낸 판소리 절창(絶唱)이 제대로 심금을 울렸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 배우는 수국 역의 윤공주였다.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우리 어무니 아니여, 이런 숯댕이가 아니여"라고 절규할 때는 신들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상여 위에 올라가 울면서 춤을 추는 마지막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라 할 만했는데, 연극 '푸르른 날에' '홍도' 등의 결말에서 보여준 연출가 고선웅 특유의 카타르시스가 관객을 울면서 웃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