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제품은 필요없어… 作品을 만듭니다

입력 2015.07.18 03:00

[脈을 잇다] 나전칠기 父女 권영진·권미정

"천년 지나도 찬란한 명품 만들자" 각고 40년 아빠는 新기법들 창안
"나도 쓸만한 칠장이가 돼야죠" 딸은 10년 전 스물넷에 수제자 자원

옻칠하고 조개껍데기를 붙여 장식한 우리 전통 공예 '나전칠기(螺鈿漆器)'. 이젠 전국을 합쳐 기능인은 200명 남짓 남았는데 대부분 환갑을 넘겼다. 맥이 끊길 위기다. 경기 구리시 수택동에 가면 허름한 건물 2층에 공방(工房)을 차려 함께 나전칠기 전통을 잇는 부녀(父女)가 있다. 권영진(56)·권미정(34)씨다.

더운 날 부녀는 송골송골 땀을 훔쳐가며 보석함에 옻칠하고 영롱한 자개들을 붙이고 있었다. 자신을 꾸미는 일에는 관심 없어 보였다. 촬영할 것이라고 미리 알렸지만 아버지는 러닝셔츠에 반바지 차림이다. 윗머리가 빠져 훤히 드러났고 남은 머리도 흰머리가 많다. 옆머리로 가려본 적도, 염색한 적도 없다고 했다. 화장품도 안 바르고 비누로 감는다고 했다. "껍데기가 중요한가요? 보여줄 건 작품이지, 몸뚱이가 아니잖아요." 옻칠에 열중하는 딸도 뿔테 안경에 화장기 없는 민낯이다.

구리시 봉산칠기 공방에서 칠기를 만드는 아버지와 딸 권영진·권미정씨가 삼베에 칠을 얹어 몸체를 만든 장구를 보여주고 있다.
구리시 봉산칠기 공방에서 칠기를 만드는 아버지와 딸 권영진·권미정씨가 삼베에 칠을 얹어 몸체를 만든 장구를 보여주고 있다. /고운호 객원기자
권영진씨가 옻칠을 시작한 건 배가 고파서였다. 강원 원주에서 4형제 장남으로 태어나 돈 벌려고 서울 답십리 친척집으로 갔다. 당숙 소개로 목공소에 들어가 문짝을 짜고 옻칠도 배웠다. 옻나무 근처만 지나도 독(毒)이 오르던 그에겐 고역이었다. "온몸에 물집이 잡히고 눈가가 부어 앞이 안 보일 정돕니다. 그렇지만 면역력 약해질까 봐 약도 안 먹고 버텼죠. 3년 지나니 괜찮아지더군요."

처음부터 전통 옻칠을 고집한 것은 아니다. '돈이 된다'기에 화학약품 '카슈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30년 전 칠기 장인 정수화(61) 선생을 만나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돈 벌어 식구한테나 인정받는 사람 되지 말고, 제대로 된 작품으로 후손이 알아주는 장인이 돼보라' 하시더군요. '그래, 아직도 빛이 찬란한 고려시대 나전칠기 같은 작품을 나도 만들자'고 다짐했죠."

멘토 정수화 선생은 2001년 인간문화재 칠장(漆匠)이 됐고, 권영진씨는 그해 기능경기대회에 처음 출전해 경기도대회 금메달, 전국대회 은메달을 땄다. 이후 8년간 옻칠공예대전에서 대상을 받는 등 40번 넘게 수상했고, 2010년 칠기 명장이 됐다.

딸 권미정씨는 수제자를 자청했다. "어릴 적 알싸한 옻칠 냄새는 곧 '아빠 냄새'였어요. 아빠에게선 늘 깊게 밴 옻칠 냄새가 났고, 그게 아빠 냄새라고 알고 자랐죠." 스물네 살이던 10년 전, 정식으로 옻칠을 배우기로 결정하던 날, 남동생은 "누나한테서도 아빠 냄새가 난다"고 했다. 권미정씨는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쓸 만한 칠장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천년 지나도 빛나는 칠기를 만들고 싶다. "내일 팔 물건이면 오늘 대충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후대에 물려줄 칠기를 만들자면 한 과정도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돼요." 그는 전통 기법을 유지하면서도 계속 새 작품을 내고 있다. 몸체를 삼베와 옻칠로만 만든 '건칠 장구'를 선보였고, 화장대로 바뀌는 다기능 반닫이는 특허를 받았다. 삼베와 옻칠로만 제작한 바이올린과 3m 크기 칠기 화병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칠기 명장에다 인간문화재 이수자지만 생활은 빠듯하다. 옻칠한 찻잔과 수저를 팔고 한옥에 옻칠해주러도 다니지만 수요가 격감하는 탓이다. "나는 그렇다 치고, 딸은 형편이 나아져야 할 텐데. 전통에 관심들이 없으니…." 이런 말도 했다. "옻칠만 40년 넘게 했지만 오래한 건 자랑이 아닙니다.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죠. 하나라도 소홀하면 '제품'은 될지 몰라도 '작품'은 될 수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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