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 정상회의에서 그리스 구제금융안 합의가 이뤄졌지만 본질이 크게 바뀔 것은 없다. 그리스 사태의 핵심은 결국 그리스 국민이다. 아무리 치프라스 총리가 합의안에 서명했더라도 국민이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안 됐다면 미봉책일 뿐이다. 실제로도 그렇게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4년 전 1차 부도 위기를 맞았던 그리스 취재 때 문제의 본질을 생생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당시 목격한 장면 중 하나다. 아테네 한복판에서 마주친 수백 명 시위대의 상당수는 'POLICE' 마크가 선명한 경찰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데모는 여느 시위대와 다르지 않았다. "(재정 긴축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구호와 노래를 부르고, 누구에겐가 "우~" 하고 야유를 보냈다. 방패와 헬멧으로 무장한 경찰 병력이 도로를 차단하고 시위대 행진을 막았다.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근무 중' 경찰과 '시위 중' 경찰이 대치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경찰뿐 아니었다. 판사들은 급여 삭감에 항의해 오후 재판을 거부하며 부분 파업에 나섰다. 안 그래도 늦기로 유명한 그리스의 재판 체증(滯症)은 더욱 심각해졌다. 범죄 피의자는 처벌받지 않은 채 거리를 활보하고 법률 분쟁을 몇 년씩 끄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스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30년 전 그날' 비극이 시작됐다고 했다. 사회당(PASOK) 좌파 정권이 출범한 1981년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당시 총리는 그리스식(式) 복지의 초석(礎石)을 만든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1919~96)였다. 취임 직후 그는 훗날 두고두고 인용되는 유명한 지시를 내각에 내린다. "그들(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 줘라(Give them all)!"
더 놀라웠던 것은 1981년 '그날' 이후 부패로 처벌받은 정치인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2008년 8월 그리스 정계에 '지멘스 스캔들'이 터졌다. 전자장비 업체 지멘스가 정부 입찰을 따내려 수천만 유로의 뇌물을 정·관계에 뿌렸다는 의혹이었다. 그리스 의회가 조사에 착수했고 돈이 살포된 정황이 드러났다. 그러나 감옥에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온갖 검은돈 스캔들이 쏟아져도 그리스 국민은 너그러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재정 파탄에 대한 정치권 책임론이 비등해지자 2010년 집권 사회당의 부총리는 이렇게 항변했다. "우리 모두 함께 해먹지 않았나?" 정치인은 돈(복지 지출)으로 표를 샀고, 유권자는 부패를 눈감아주었다. 정치권과 포옹하며 2인1조로 '복지의 춤판'을 벌인 그리스 국민 역시 공범(共犯)이었다.
그리스 취재 기간 중 청소부 노조가 파업에 돌입했다. 쓰레기가 쌓이자 그리스 정부는 민간 업체를 고용해 수거에 나섰다. 그러나 노조가 실력 행사로 이를 저지했다. 쓰레기를 치우려는 민간 트럭을 불태우고 운전사를 폭행했다. 결국 정부는 손을 들고 말았다. 아테네에 머문 일주일 동안 쓰레기 악취로 코를 쥐고 다녀야 했다.
이래선 안 된다고 용기 있게 반기 든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 야당 의원이 노조의 극렬 투쟁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자 그가 부업으로 운영하던 서점에 17차례의 방화 테러가 가해졌다. 총파업 방침에 불복하고 영업하던 은행에 화염병이 날아들어 3명이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범인이 잡혀 처벌받은 적은 거의 없다. 포퓰리즘에 이의를 제기하는 어떤 시도도 기득권으로 무장한 이익집단에 의해 봉쇄되는 구조였다.
취재 중 만난 아테네 상공회의소 간부가 그리스의 딜레마를 한마디로 정리해주었다. 그는 "탱고(춤)는 혼자 추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스 정치권과 국민은 30여년간 서로 끌어안고 '복지의 탱고'를 추었다. 그리스가 몰락한 가장 큰 이유는 포퓰리즘에 치달은 정치 리더십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정치인에게 계속 권력을 준 것은 유권자였다.
처음엔 정치가 달콤한 말로 국민을 유혹했을 것이다. 그런데 갈수록 국민 쪽이 더 빠져들었다. 이윽고 새벽이 밝아와 요란하게 비상벨이 울리는데도 춤판은 끝나지 않았다. 끝내긴커녕 더 강한 포퓰리즘의 치프라스 정권으로 파트너까지 바꿔가며 탱고를 계속 추었다. 오히려 국민이 더 안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국민이 포퓰리즘 정치를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구제금융안에 합의했지만 이것으로 그리스 사태가 해결될 것으로 본다면 오산이다. 과거에도 그리스는 EU(유럽연합)와 두 차례의 구조개혁안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전과(前科)가 있다. 국민 반발 때문이었다. 노조와 공무원, 심지어 경찰과 판사까지 나서 재정 긴축에 집단적으로 저항했다. 그런 본질이 달라진 것도 없다. 이달 초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도 국민투표안을 부결시킨 것이 그리스 국민이다.
이번엔 달라질까? 짧지만 그리스를 현장에서 경험해본 나는 아니라는 쪽에 걸겠다. 그리스 국민이 나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복지의 춤판을 맛본 국민이 이것을 포기하기란 마약 끊기만큼 힘든 법이다.
입력 2015.07.14. 03:00업데이트 2015.07.14.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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