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한식의 탄생 (69) 굴

찬 바람에 깊어지는 단맛… 한입에 호로록

우리는 한식 또는 한식화된 음식에 녹아있는 유래와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와 관련된 정보들을 하나씩 풀어보는 '한식의 탄생'. 한국인이 일상에서 접하고 있는 음식을 조금 더 깊숙히 들여다보자.

  • 취재=박정배 음식 칼럼니스트,'음식강산' 저자
  • 편집=뉴스큐레이션팀

    입력 : 2017.10.25 09:43

    찬 바람 불면 굴에 살이 오르고 단맛이 깊어진다. 바위에 붙어살아 석화(石花)라고도 부르고 모려(牡蠣), 이황(蜊蝗), 려(蠣), 호(蠔) 등으로도 칭한다. 20세기 전까지 한반도 남쪽에서는 석화라는 단어를, 북쪽에서는 모려를 주로 사용했다.

    조선 세종·문종·세조에 걸쳐 어의(御醫)로 활약한 전순의(全循義)는 왕실의 음식 치료법을 모은 식료찬요(食療纂要·1460)에서 '술을 먹고 난 후의 번열(煩熱·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나는 증상)을 치료하고 갈증을 그치게 하려면 굴(牡蠣肉)에 생강과 식초를 넣어 날로 먹는다'고 적었다.

    굴은 한반도 전역에서 고르게 생산됐다. 1908년 일본인들이 쓴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는 근대식 양식 이전 조선의 굴 산지로 '함경도 황어포·영흥만, 낙동강 하구 동쪽 일대, 광양만, 순천만(여자만), 보성강, 강진만, 충청도 천수만, 황해도 용위도 등'을 들고 있다. 일제강점기 신문에는 '원산 모려'와 수원의 '남양석화'가 유명하다고 자주 나온다.

    굴은 조선 시대부터 회·구이·밥·죽·김칫소 등 다양하게 사용됐다. 이익은 성호전집(星湖全集)에 굴을 '순무에 잘게 섞어 김치를 만들어서' 술안주로 먹었다고 썼다.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는 굴을 넣은 박죽(瓠粥)·석화죽, 연포탕, 굴밥이 등장한다. 진상품으로 올릴 만큼 귀했던 굴은 1887년 전남 고흥에서 양식이 시작되고, 1960년대 통영에서 양식이 본격화되면서 서민적인 식재료가 되었다.

    조리법도 다양해져서 이용기(李用基)가 1924년 지은 한식 요리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굴밥, 굴김치, 굴장아찌, 굴전유어, 굴회가 등장한다. 고흥에서는 굴을 껍데기째 끓여 뽀얗게 국물을 우려낸 '피굴'을 즐겨 먹고, 통영에선 무와 굴을 무쳐 발효한 '굴무젓'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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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배는  
    남해 섬에서 남해 출신의 아버지와 삼천포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남해 죽방렴의 멸치와 삼천포의 쥐치 같은 비린내 나는 날것들을 먹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며 돼지고기, 쇠고기 등 기름진 음식을 접했고, 음식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 처음으로 평양냉면을 비롯한 북한 음식을 맛보며 우리 음식의 다양성에 눈을 떴고, 대학생 시절 폐선 되기 직전의 수인선 여행의 낭만이 몸속 구석구석 남아 있다가 일본 기차여행을 하면서 되살아났습니다. 방송 프로듀서, 출판사 대표, 애니메이션 제작사 대표 등 다양한 문화계 일을 해왔습니다. 일본을 70여 회 먹고 마시면서 돌아다녔고, 현재 음식평론가와 여행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음식강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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