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용중 정치부장

올해 들어 정치 기사의 태반이 여당은 친박(親朴)과 비박(非朴), 야당은 친노(親盧)와 비노(非盧)의 싸움에 관한 것이다. 싸움 구경이 아무리 재밌다 한들 각각 10년, 15년간 계속되고 있는 여야의 계파 싸움은 신물이 난다. 지금 친박과 비박은 서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대통령을 가운데 놓고 서로 도박을 하는 지경이다. 친노와 비노는 도장만 안 찍었지 심정적으론 헤어진 지 오래다. 양당의 계파 싸움이 내년 4월 총선 공천 때까지 점점 험악해질 것을 생각하면 암담하다. 그렇다고 '여야 관계가 신선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2012년 국회선진화법이 만들어진 이후 여야가 꼼수 거래를 하는 '의정(議政) 코미디'가 3년째 이어지고 있으니 이젠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계파의, 계파에 의한, 계파를 위한 정치는 갈수록 민의(民意)와 멀어진다는 걸 정치인들 스스로도 안다. 그런데도 한 지붕 밑에서 두 살림 하는 걸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지역주의에 기대야 쉽게 승리할 수 있는 선거제도, 대선에서 승자가 통치권을 독식하되 패자도 제1야당의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정치 구조 때문이다.

계파 패권주의에 짓눌려 있는 정치판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정치 개혁' 하면 제도 개선부터 얘기한다. 그러나 제도 개선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답은 아리송하지만 '제도가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의 답은 사람이다. 제도를 바꾸려면 주체 세력부터 새롭게 꾸려야 한다는 얘기다. 현재 여야의 기득권 체제에선 국회의원 선거의 룰조차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앙선관위가 지난 2월 지역주의 완화를 위해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석패율제를 권고했지만 국회 서랍 속에서 썩고 있다. 한 지역구에서 1명을 뽑는 현행 소선거구제를 2~4명을 뽑는 중선거구제로 바꾸는 일은 더욱 불가능하다. 이미 여야 대표들이 차기 대통령을 꿈꾸는 상황이기 때문에 내각제 등으로 권력 형태를 바꾸는 개헌도 어렵다.

이를 타개할 방안 중 하나는 유권자들의 계파 정치에 대한 염증 극복을 명분으로 여야의 4개 계파가 '헤쳐 모여' 하는 것이다. 이미 물밑에선 그런 움직임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첫째, 선진국 정당은 대부분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끼리 모인 '잡동사니 정당' '짬뽕 정당'이 아니라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나뉘어 있다. 그래야 유권자는 입맛에 맞는 정당을 고르기 편하고, 정당은 충성심 있는 유권자들을 충실하게 대변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4개 계파를 이념적으로 펼치면 친박이 우(右), 비박과 비노가 중도(中道), 친노가 좌(左)가 될 것이다. 이들이 어떻게 합종연횡 할지는 모르겠지만 비박과 비노가 합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박+비노' 정당은 이념적 정체성이 비슷하고 영호남 지역주의를 완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비박은 수도권 중심이지만 영남 일부에도 퍼져 있고, 비노의 중심은 호남이기 때문이다.

둘째, 정치판이 새로 짜일 경우 2년 넘게 남은 박근혜 정권이 어렵지 않겠느냐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여당 판도와 국회 상황이 박 대통령을 제대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현행 국회선진화법 아래서 어차피 의원 수 60%를 넘지 못해 법 통과가 마음대로 안 되는 마당이라면 '친박 정당'이 나머지 2개 또는 3개 정당 중 연대할 경우 60%를 넘을 수 있는 정당을 택하는 것이 국정의 안정적 추진을 위해 유리할 수 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의 일부 참모들은 역대 대통령마다 퇴임 후 어려운 상황에 빠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박 대통령이 정권 재창출의 조연 역할을 하기보다는 퇴임 후에도 의원 30~40명의 확실한 지지를 받는 게 중요하다는 속내를 밝혀 왔다. 문재인 대표를 중심으로 한 친노 세력도 종북(從北)을 제외한 정의당 등 군소 정당과 합쳐서 단일 스크럼을 짜는 것이 건설적이고 강한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현재의 양당 독과점 체제에선 상당수 인사가 공천만 받으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 이런 기형적 풍토에선 여야 의원의 자질 시비가 끊이질 않게 된다. 하지만 전국 곳곳에서 3~4개 정당이 경쟁하게 되면 각 당은 경쟁력 있는 후보를 내세울 수밖에 없다. 그러면 국회의원들의 수준이 높아질 것이다.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이 올봄 10판(版)을 낸 '헌법학원론'의 새 서문에서 '합의제 민주주의 모델을 찾아보자'며 다당제, 내각제로의 헌법 개정 필요성을 언급한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4개 계파가 양대 정당 내에서 집안싸움을 하는 소모전이 총선과 대선까지 이어진다면 정치권 전체에 파산 선고가 내려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