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3월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신입생 환영회. 더벅머리 새내기 한 명이 기타를 들고 선배들 앞에 섰다. 그가 미국 록밴드 '캔자스'의 노래 'Dust In The Wind'를 부르자 사람들은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대학에서 운동가요 외엔 가창이 허락되지 않던 시절, 그의 팝송은 너무나 유려했다. 안치환(50)의 첫 등장이었다.
'솔아 푸르른 솔아'부터 '잠들지 않는 남도'까지 안치환이 만들고 부른 노래는 1980~90년대 민주화운동의 배경 음악, 아니 주제 음악이었다. '철의 노동자'는 시위 현장 뉴스에서 줄곧 들린다고 '가장 방송을 많이 탄 노래'라고 불렸다. 그는 명백한 '운동권 가수'이면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부른 로커이자 '우리가 어느 별에서'와 '내가 만일'의 포크 가수이기도 했다. 만 쉰 살이 된 그가 11번째 앨범 '50'을 냈다. 서울 연희동 그의 집 지하에 있는 스튜디오 '참꽃'에서 안치환을 만났다.
"애초엔 포크 음반으로 내려고 녹음까지 마쳤는데 지난 1년간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새로 노래들이 만들어졌어요. 그걸 먼저 선보이는 게 낫겠다 싶었지요." '지난 1년간의 경험'이란 작년 4월 직장암을 발견하고 투병한 세월을 말한다. 항암 치료에 이은 수술과 다시 이어진 항암 치료를 받으며 그는 "너무 괴로워서 죽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래 나는 386이다'와 '나는 노래하는 노동자다' 같은 노래를 쓰고 불렀던 그의 신곡엔 그래서 '나는 암환자'가 포함됐다. "내 목숨/ 주인은 암이 아니라/ 널 이겨낼 나라는 걸/ 내가 몸으로/ 보여주겠어" 같은 가사는 삶을 음악으로 옮기는 포크록 정신에 투철하다. 진물이 떨어질 것 같은 그의 창법이 너무 절절해서 듣는 이가 아플 지경이다.
"제가 노래를 만든 이유와 부른 과정을 제 몸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부른 것 같아요.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거죠. 1년을 죽다 살아났는데 절절하지 않으면 이상한 거죠." 안치환은 작년 9월부터 녹음을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무리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힘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노래를 불렀다. "제가 천상 딴따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힘드니까 오히려 더 노래를 해야지, 노래를 해서 내 몸을 더 기쁘고 즐겁게 만들어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간 모든 음반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았던 안치환의 새 앨범은 그래서 처음으로 사적(私的)이다. 그는 "암에 맞서서 내가 부르는 결연한 투쟁가"라며 웃었다. 앨범 마지막에 1분42초짜리 노래 'Shame On You'가 담겨있다. 제목(부끄러운 줄 알라)이 반복되는 가사 중간에 의외로 "아베!"라는 외침이 등장한다. 그는 "상징적으로 아베 일본 총리의 이름을 넣었다"고 했다.
타이틀곡 '희망을 만드는 사람'은 그가 대학 때부터 좋아해 온 정호승 시인의 시에 멜로디를 붙였다. 안치환은 앨범 속지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허락된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썼다. 그 다짐이 담겨있는 노래다. 그는 "뮤지션으로는 후회없이 살았지만 전체적으로는 뭔가 문제가 있었으니 암이라는 옐로 카드를 받은 것"이라며 "카드 한 장 더 받아 퇴장당하지 않고 경기를 끝내고 싶다"고 했다. 안치환 인생 후반전이 이제 막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