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날 버릴 때 의지한 곳… 茶山과 난 비슷한 팔자"

    입력 : 2015.06.24 03:00

    [문갑식이 간다] 평생 다산초당 지켜온 윤동환

    정약용 돕고 제자 배출한 가문 후손, 강진군수 4년 빼곤 초당 밑에 살아
    기념사업회 만들고 진흥원도 열어… 매일 관람객 수백명에게 직접 해설

    문갑식 선임기자 사진
    문갑식 선임기자

    307년 전, 전남 강진군 귤동마을에 '슬픈 천재'가 나타났다. 사내는 이 고을 아홉 개 강이 모인다는 구강포를 등진 채 비탈을 올랐다. 야생차가 만발해 다산(茶山)이라 불리는 만덕산 줄기였다. 누군가 그가 올 걸 예감했는지 하필 산이 들어선 자리 이름이 봉황리다.

    정조가 천하 기재(奇才)라며 아꼈던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왕의 사후 귀양길에 올라 17년을 강진에서 보냈다. 훗날 사의재(四宜齋)라 불리게 된 주막과 고성암(高聲庵)과 제자 집을 7년간 떠돌던 다산에게 초당을 내준 이가 윤단(尹慱)이다.

    다산의 모친은 고산 윤선도가 5대조, 공재 윤두서가 할아버지인 해남 윤씨니 저승의 어머니가 곤경에 처한 아들을 도운 격이다.

    '목민심서' '아방강역고' 같은 역작의 산실인 초당은 1818년 8월 15일 정약용이 귀양을 마치고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생가로 돌아가면서 잊혔다. 1900년 전후로는 주춧돌과 '정석(丁石)'이라고 새겨진 바위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위당 정인보가 "다산 1인 연구가 곧 조선 역사의 연구"라고 평했던 잊힌 천재를 되살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외국인들이었다. 6·25 때 미군 문정관 헨더슨이 1년에 몇 차례씩 나타났고 1939년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가 다산이 즐겼던 차를 연구하러 왔다.

    윤동환 전 강진군수가 귀양살이를 끝내고 생가로 돌아간 다산이 제자들과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윤동환 전 강진군수가 귀양살이를 끝내고 생가로 돌아간 다산이 제자들과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작가 이서현 제공

    이런 광경은 귤동에 살던 해남 윤씨들이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한 계기가 됐다. 그들은 1958년 '정다산 유적보존회'를 결성하고 당시 돈 300만환을 모아 이듬해 지금의 다산초당을 재현했다. 이들은 다산이 유배 시절 길러냈던 열여덟 명 제자의 후손이다.

    1952년생 윤동환(尹棟煥·63)은 민선 3기로 강진군수를 지낸 기간을 제외하곤 평생을 초당 밑에서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산에게 초당을 내준 윤단이 그의 6대조이며 다산의 열여덟 제자 가운데 막내로, 다산초당 바로 밑에 묻힌 윤종진이 4대조이기 때문이다.

    "초당은 어릴 적 제 놀이터였습니다. 제가 데모하다 세 번이나 퇴학당해 건국대를 12년 만에 졸업했어요. 그때마다 이곳에 내려와 지냈으니 다산 선생님과 비슷한 팔자지요." 그래서 그는 다산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스스로에게 다심(茶心)이란 호를 붙였다.

    윤동환은 1985년 다산초당 가는 길 입구에 '다산문화진흥원'도 열었다. 다산의 제자들이 결성한 다신계(茶信契)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진흥원 앞에서 그는 평일 300~400명, 휴일이면 500명이 넘는 관람객을 위해 다산의 의미를 설명해주고 있다.

    "딱 18분만 설명을 듣고 가라고 합니다. 그때마다 하는 얘기는 다산의 말씀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게 '쉬지 말고 기록하라, 기억은 흐려지고 생각은 사라진다. 머리를 믿지 말고 손을 믿어라'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다산은 메모광(狂)이었어요."

    다산문화진흥원을 연 이유가 있다. "보다시피 초당 근처 사방 십리에 잘 곳도 차 한잔 하며 쉬어갈 곳도 없습니다. 원하는 분들은 다 무료로 재워 드렸는데 몇몇분이 '그것은 실학(實學)과 어긋나며 다산이 알면 혼이 날 것'이라고 해 돈을 받게 됐지요."

    윤동환의 설명을 듣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김재보(金在寶·53)를 볼 수 있다. 그는 강진군이 선발한 '다산초당 제1호 경비원'이다. 초당에 오기 전 청자(靑瓷)연구소에서 일하다 뇌일혈을 일으킨 그는 여전히 말과 행동이 어눌하지만 아침 8시면 이곳에 온다.

    "아침 일찍 와 앞마당을 쓸고 초당과 동암과 서암을 살펴보지요. 다산이 직접 만든 연못인 연지(蓮池)도 돌보고 그 안에 세워진 석가산(石假山)도 보고 잉어에게 잘 지냈느냐고 인사도 건네고. 다음에는 동암 지나 천일각(天一閣)에 가서 나무도 치고 그럽니다."

    김재보가 오기 전 초당에는 일용직 직원이 때때로 들락거릴 정도였다. 지금 그는 초당에 하루도 빠짐없이 나올 뿐 아니라 오후 5시 해가 넘어갈 때쯤 퇴근할 때까지 관람객이 묻지 않아도 스스로 나서 역사를 설명해주는 '문화해설사' 역할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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