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칼럼] 병균에도 이기고 '두려움'균에도 이기자

조선일보
  • 양상훈 논설주간
    입력 2015.06.18 03:20

    평생 전염병 투사가 남긴 말 '병균에 지는 것이 아니라 불안감에 지는 것이다'
    대통령은 무릎 꿇고 빌고 신뢰받는 전문가들이 '두려움 이기자' 앞장서길

    양상훈 논설주간
    양상훈 논설주간
    고(故) 박승철 박사는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를 창설하고 2003년 사스대책자문위원장, 2009년 국가 신종플루대책위원장을 역임한 분이다. 얼마 전 그의 1주기를 맞아 박 박사가 전염병이 창궐할 때 전장(戰場)의 장수처럼 했던 말을 가족이 페이스북에 올렸다. 평생을 병균과 싸워온 장수가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필자 생각).

    1. "인류 역사는 병균과 싸워온 역사이고, 늘 인류가 이겨온 역사다."(메르스와 벌이는 싸움은 빨리 끝나지 않을 것이고 희생자도 더 나오겠지만 결국 인간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2. "전염병은 근본적으로 빈곤병이다. 영양이 부실한 빈곤 국가에서 저항력이 낮은 사람들에게 치명적 영향을 주는 것으로, 지금 우리나라같이 과(過)영양 국가에서는 일단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메르스 발병 후 한 달인데 5000만 인구 중 감염된 사람은 200명이 되지 않는다.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3. "그러나 병인 이상 반드시 취약한 사람이 있고 희생자가 나오기 마련이다."(메르스는 치사율이 12% 정도로 높다. 처음엔 40%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 치사율이 대중에게 줄 공포를 간과했다. 어리석다고밖에 할 수 없다.)

    4. "전염병과 싸우는 의사는 미생물을 보지 말고 불안해하는 국민을 봐야 한다."(의사 이상으로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가 이렇게 했어야 한다. 초기에 대통령이 직접 비상령을 내렸으면 지금 상황은 아주 다를 것이다. 박 대통령은 포퓰리스트라는 소리까지 듣지만 대중을 뒤따라가기만 하지 이끌 능력은 없는 듯하다. 전염병이 통제를 벗어났다는 불안감을 만들고 퍼뜨린 수퍼 전파자 한 사람을 꼽으라면 불행히도 대통령이다.)

    5. "미생물에 지는 것이 아니라 불안감에 지는 것이다."(병균에는 결국 이기겠지만 불안감에는 이미 졌다. 병균 피해보다 불안에 따른 피해가 더 크다. 정부 잘못이지만 언론의 과열화 경향도 불안 심리를 키우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6. "전문가는 객관적인 과학에 입각해 최악 상황에 대비하고 문제 해결의 방향성을 잘 잡아야 한다."(삼성서울병원은 정확하게 그 반대로 했다.)

    7. "불안감에 기생하여 덕을 보려 해서는 절대 안 된다."(정치인들은 행동하기 전에 이 말을 한번 되새겨봐야 한다.)

    8.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병에 대한 두려움 그 자체다."(전염병이 돌면 두 가지 균이 돌아다니는데 하나는 병균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라는 균이다. 더 무서운 건 '두려움'균이란 게 박 박사의 결론이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2…제1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13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뿐이 모였소/ 그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 시인 이상(李箱)은 지금 한국 사회를 보고 시 '오감도'를 쓴 것 같다.

    '두려움'균은 메르스와 달리 공기 전염되고 마스크나 손 씻기로도 막을 수 없다. 이미 몇 백만, 몇 천만명이 감염됐다. 지난 주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주차장이 거의 비었고 관광버스는 단 한 대도 없는 진풍경을 보았다. 늘 줄 서야 했던 식당에 빈자리가 생기고, 물건을 집으로 배달해달라는 주문이 폭증했다. 조류인플루엔자 때는 닭고기 장사가 망하고, 구제역 때는 돼지고기 값이 폭락하고, 비브리오패혈증 때는 수산업이 무너질 위기까지 갔다. 광우병 사태도 마찬가지였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 때 경기도 교육감은 비 예보가 나왔다고 일제 휴교령을 내렸다. 모두 지나친 쏠림 현상이고 다른 선진국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얼마 전 서울에서 열린 세계 과학기자 대회에 참석한 외국 기자들은 메르스 때문에 걱정하는 우리 주최 측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모두 병원 감염인데 왜 걱정하느냐는 것이었다. 어린 딸을 한국 대회장에 데리고 온 기자도 있었다. 한 외신은 '한가해진 지금이 서울을 즐길 완벽한 기회'라고 썼다. 대구 공무원이나 삼성병원 이송 요원처럼 오염된 병원에 있었으면서도 밖으로 돌아다닌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메르스 감염 확진자 전부는 오염된 병원의 환자, 환자 가족, 문병객, 병원 종사자다. 불확실한 한 사람이 있으나 그 역시 오염된 병원과 관련이 없지 않다. 오염 가능 범위를 넓게 잡아도 관련 없는 국민이 99%가 넘는다. 이 99% 국민 사이로 '두려움'균이 떠다니고 있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대통령이 제대로 반성도 않고 "일상생활로 돌아가자"고 해서 사람들 화만 돋웠다. 분노가 치밀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은 대통령이 아니라 메르스에 잘 대처한 병원의 전문가들이 해야 한다. 방역은 0.001% 최악의 가능성에도 대비하되 99% 국민은 '두려움'균을 이겨냈으면 한다. 이겨낼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올 뿐이다. 이미 관광산업이 직격탄을 맞았고 고용 시장이 얼어붙었다. '두려움'균의 연전연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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