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 칼럼] 메르스 사태가 한국 사회에 묻다

조선일보
  •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입력 2015.06.12 03:20

    '各自圖生 강요한 無能 정부가 메르스보다 무섭다'는 게 民心
    市民 의식 빈곤이 禍 키웠어도 정부 責任을 돌리려 해선 안 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역량과 정치공동체에 대한 시험대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주말에 열릴 예정이던 학회를 연기한다는 급보가 날아든 게 며칠 전 일이다. 각종 학교들이 줄줄이 휴업하는 마당에 학회 개최가 무슨 대수냐 하겠지만 1년에 두 차례 열리는 전국 규모의 정기 학술대회가 취소된 경우는 지난 30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다. 철학계에서조차 이럴진대 전국을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트린 메르스 파동이 전시(戰時) 버금가는 비상사태인 게 명확하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방미(訪美) 일정을 미룬 것은 정확한 결정이었다.

    메르스가 제어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이 방미를 강행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뚜렷한 성과를 내기 어려운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성격을 감안하면 국내 상황은 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성난 민심의 파도가 박근혜 정부를 통치 불가능한 국면으로 휩쓸고 갈 최악의 가능성조차 배제하기 어려울 정도다. 지금 상황은 그만큼 심각하며 대통령 방미 연기는 그런 상황을 제대로 짚은 것이다.

    의학적으로 메르스 자체는 별게 아닌데도 광우병 사태의 경우처럼 쉽게 공포에 휩쓸리는 국민 정서가 진짜 문제라며 우중(愚衆)의 심약함을 질타하는 사회 일각의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본말(本末)이 전도된 주장이다. 과학적 근거가 없던 2008년의 광우병 파동이 일으킨 가짜 공포와 객관적 실체가 엄존하는 2015년의 메르스 사태가 야기한 현실적 두려움을 평면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7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건의 국내 발병 사례조차 없는 인간광우병과 채 한 달도 안 돼 100명이 넘는 확진 환자와 10명의 사망자를 낸 메르스를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국내에서 매해 2000명 이상 사망하는 결핵에 비해 메르스의 공포가 부풀려졌다는 비판은 원론적으로는 옳다. 하지만 결핵의 정체가 잘 알려져 있고 완치(完治)도 가능한 데 비해, 때로 치명적인 데다 그 메커니즘까지 불확실한 메르스 같은 전염병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보통 사람이 삶의 현장에서 느끼는 이런 무형(無形)의 공포감은 분명한 사회심리적 실체이므로 두려움을 과학의 이름으로 과소평가하는 건 의학의 오만에 불과하다. 게다가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지켜주기는커녕 각자도생(各自圖生)을 강요하는 정치권력의 무능함은 거대한 악몽(惡夢)으로 비치고 있다. '무능한 정부가 메르스보다 더 무섭다'는 민심 앞에 박근혜 정부는 출범 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빈곤한 시민의식이 메르스 파동을 키웠을 여지는 부분적으로 사실로 인정된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시민들의 자기 성찰이 정부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건 경계해야 한다. 책임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뒤섞는 것이야말로 무능한 정부가 바라는 책임 회피 방식이기 때문이다. 책임의 경중(輕重)을 엄격히 물어야 변화가 가능하고, 책임 정치에 입각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박근혜 정부는 초동 대응에서 크게 실기(失機)한 데다 시대착오적 비밀주의로 국민의 불신과 공포를 부추기기까지 하는 악수(惡手)를 두었다. 2003년의 사스 퇴치 사례가 증명하듯 행정 시스템으로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었을 후진국형 전염병이 온 나라를 흔들고 국격을 추락시키며 국민적 에너지를 탕진하는 지금의 참담한 현실이 그 결과다.

    그러나 두려움과 싸우는 궁극적 힘은 사실과 합리성에 대한 신뢰에서 온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만성 기저 질환이 있는 경우 외에는 메르스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데 동의한다. 청소년에게 메르스가 퍼지는 경우가 드물고, 설령 감염되었더라도 건강한 사람은 잘 이겨낼 수 있다는 세계 학계의 보고(報告)는 희망적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국내 확진 환자가 병원 감염 범주 안에 있으므로 우리에게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한 세계보건기구(WHO)의 권고를 경청해야 한다.

    무능한 정부가 초래한 각자도생의 트라우마는 국민 모두에게 깊은 상처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메르스 사태도 잦아들 게 분명하다. 지금 시점에서 정말로 중요한 과제는 정부에 대한 불신이 국가에 대한 회의와 한국 사회에 대한 환멸로 번져나갈 여지를 막는 데 있다. 정부의 정책 실패가 정치 공동체 전체의 실패로 비화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은 평범한 시민들의 힘이다. 메르스 사태는 함께 어울려 사는 자유 시민의 공동체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역량(力量)에 대한 시험대이다. 그 싸움에서 우리가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점을 한국 현대사는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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