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세종시 정부청사에서 최경환 국무총리 대행이 주재한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관련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 명칭은 제1차 범정부 메르스 일일 점검회의다. 국내에서 첫 메르스 확진 환자가 나온 후 무려 20일 만에 범정부 차원의 일일 점검회의가 처음 열린 것이다. 그 사이 메르스 관련 회의는 차고 넘쳤다. 정부 안에 설치된 대책 기구만 3개나 된다.
그런데도 정부는 지금껏 국민을 안심시키지 못했다. 대통령은 줄곧 이 사태로부터 한발 물러서 있는 느낌을 줬고, 총리 대행을 맡은 최 경제부총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하느라 일주일 가까이 외국을 다녀왔다. 국민을 이끌 리더십도, 구심점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무능한 정부를 향해 비난을 퍼붓는 일보다 더 시급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메르스 사태는 이제 국내에서 영화관·식당의 매출이 감소하는 정도의 경제적 부작용을 키우는 선에 그치지 않고 있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예정된 한·중 언론인 포럼을 돌연 취소하면서 한국인의 중국 방문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홍콩·대만은 노골적으로 자국민들의 한국 여행을 통제하고 있다. 메르스 사태는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깎아내리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메르스 확산의 고리를 끊고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이 수렁에서 벗어나는 데 국민 모두가 힘을 모으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닥친 것이다.
사실 메르스를 지금과 같은 '괴물(怪物)'로 키워온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보건·방역의 최일선을 맡고 있는 의료 기관부터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사회 구성원 모두가 메르스 사태가 번지는 데 일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공동체의 안전보다는 자신의 이익만 앞세우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메르스 확진 환자 중에는 자신이 메르스 감염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나 병원을 찾았다는 것을 끝까지 숨기려 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확진 판정을 받은 첫 환자부터가 메르스 최대 발병국인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건국대병원 응급실을 찾은 70대 환자는 끝까지 자신이 메르스 환자가 다수 발생한 서울삼성병원을 방문한 사실을 숨겼다. 병원 측에서 몇 번을 되물어도 환자와 보호자 모두 "그곳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이 거짓말 때문에 건국대병원 응급실이 폐쇄됐고 70여명이 격리됐다. 감염 가능성이 있다고 만류하는데도 출국을 강행한 사람도 있고, 격리 통보를 받고도 골프장에 나들이 나간 사례도 있다. 이런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면서 메르스는 결국 국가적 대형 위기로 성장했다.
싱가포르는 2003년 3월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의 직격탄을 맞았다. 당시 고촉통 싱가포르 총리는 대(對)국민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그는 편지에서 "국민 각자가 정부가 만든 모든 규칙과 지침을 지켜야만 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며 정부 방침을 따르지 않은 구체적 사례들을 일일이 나열했다. 총리가 공개적으로 국민을 꾸짖었던 것이다. 고 총리는 "자택 격리 조치를 받은 사람이 보건 당국의 전화에 응답하지 않으면 경비 요원이 즉각 달려가 전자팔찌를 채우겠다"고도 했다. 이런 정부의 강력한 조치와 국민의 협력으로 싱가포르는 두 달여 만에 사스 공포에서 벗어났다. 대만·홍콩 등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싱가포르는 가장 적은 희생을 치르고 최단 기간 내에 '사스 청정국'이 됐다.
전문가들은 메르스는 사스보다 전염력이 높지 않고, 치사율 역시 당초 알려졌던 40%보다 훨씬 낮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지금까지 발생한 사망자는 모두가 다른 질환을 앓고 있거나 면역력이 떨어진 고령(高齡)의 환자였다. 메르스에서 완치된 한 의사는 인터뷰에서 "메르스에 대해 막연하게 너무 큰 두려움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독감의 통증을 (최대치 10에서) 7이라고 한다면 메르스는 3~4 정도"라고 했다. 메르스는 환자 간 직접 접촉을 통해 감염되고, 전부 병원 안에서 발병했다. 메르스는 국가적 대응이 필요한 감염병이지만 국민이 일상생활을 중단해야 할 만큼 공포의 대상은 아니라는 말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미국인들에게 한국 여행을 그대로 해도 괜찮다는 입장을 밝힌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싱가포르 경제는 사스가 발병했던 2003년 4~6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줄곧 승승장구하던 싱가포르로서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첫 분기에서 7.5%의 성장으로 반등했다. 이런 극적인 반전(反轉)을 대한민국이 해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위기 극복의 DNA를 우리 피와 뼛속에 새기고 있다. 전란(戰亂)을 거치며 폐허 속에서 근대화·산업화를 일궈냈고, 외환 위기 때는 대다수 국민이 금 모으기로 민력(民力)을 합쳤던 역사가 바로 그 증거다. 앞서 겪은 위기들에 비하면 메르스는 이 나라가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발목을 잡을 만한 장애물이 결코 되지 못한다. 온 국민이 메르스 퇴치를 위해 다시 한 번 위기 극복의 DNA를 모아야 할 때가 왔다.
입력 2015.06.10. 03:22
100자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