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헤지펀드의 삼성 공격

조선일보
입력 2015.06.06 03:00

1988년 미국 식품기업 RJR나비스코가 사모펀드 KKR 손에 넘어갔다. 나비스코는 재계 50위권으로 오레오 과자, 델몬트 과일 통조림, 세일럼 담배 같은 유명 브랜드를 거느렸다. 골프 팬에겐 LPGA 나비스코 챔피언십을 후원했던 회사로 익숙하다. 미국인들은 이름 모를 KKR이라는 펀드가 골드만삭스를 비롯한 월가 투자은행을 제치고 나비스코를 인수한 것에 놀랐다. 250억달러, 28조원의 인수액은 사상 최고였다.

▶KKR은 자기 돈은 고작 15억달러만 들였다. 나머지는 인수할 회사 나비스코를 담보로 빌렸다. 한 해 30억달러 이자는 나비스코가 과자·담배 따위를 팔아 냈다. 대동강 물을 팔아 먹은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다. KKR은 구조 조정을 한다며 회사를 이리저리 쪼개 팔았다.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출신 둘이 그 과정을 '문 앞의 야만인들(Barbarians at the Gate)'이라는 책으로 썼다. KKR은 첨단 금융 기법이라고 했지만 저자들은 인정사정없이 돈만 밝히는 야만인으로 봤다.

[만물상] 헤지펀드의 삼성 공격
▶일본에선 2000년대 호리에 다카후미 라이브도어 사장이 미국식 기업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2005년 외국 자금을 끌어들여 일본에서 제일 잘나가는 민영방송 후지TV의 경영권 장악을 노렸다. 폐쇄적인 일본 재계는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줄 아느냐"며 호리에 때리기에 나섰다. 그는 이듬해 주가조작 사건에 휘말려 2년쯤 감옥 생활을 했고 재산도 거의 다 날렸다.

▶엊그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삼성물산 지분 7%를 사들였다고 전격 공개했다. 그러더니 "경영에 목소리를 내겠다"며 제일모직과의 합병에 반대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합쳐 이재용 부회장 체제의 사실상 지주회사로 삼으려는 삼성으로선 곤혹스럽게 됐다. 지분 싸움이 나면 다른 주주들은 신이 난다. 삼성물산 주가는 이틀 새 21% 뛰었다. 엘리엇도 벌써 1400억원을 벌었다.

▶우리나라에선 2003년 소버린이 SK를, 2006년 칼 아이칸이 주도하는 펀드가 KT&G를 공격했다. 이들은 '불투명한 한국식 경영 개선'을 앞세웠지만 결국 지분 싸움 와중에 주가가 올라 이익을 챙겼다. 8000억원과 1500억원씩 벌어 나갔다. 재벌들이 적은 지분으로 전권을 휘두르다 보면 언제든 외국 헤지펀드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약점을 발견하면 봐주지 않는다. 이제 우리도 일본처럼 국내파 사냥꾼이 나올 수 있다. 재벌 기업들은 헤지펀드 공격을 무작정 탓해선 안 된다. 그에 앞서 글로벌 기업에 걸맞은 지배구조를 갖추는 게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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