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기자, 김대중](6)직업으로서의 저널리스트…뚝심있는 보수주의 수문장

  • 송호근 서울대 교수
    입력 2015.06.04 09:12 | 수정 2015.06.04 09:55

    저널리스트, 흔한 말로 신문쟁이가 된다는 것은 그런대로 멋진 일이다. 나같이 사회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특히 그렇다. 나도 오래 전에 신문쟁이를 희망했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원 졸업을 앞둔 시절, 광주사태가 일어났다. 마침, TV에서 광주 MBC건물이 불타는 장면이 방영되었는데 그 속에 갇힌 기자들의 안부가 먼저 걱정되었다. 그런데 생각은 이상한 대로 흘렀다. 일필휘지로 사건을 분해해야할 기자가 권력에 갇혔다는 그런 인상을 받았는데 그 돌발적 사건이 나의 희망을 포기하도록 종용했다. 대신 갇힌 기자와 가둔 권력을 통째로 분해하는 그런 직업으로 희망을 전적했다. 지금하고 있는 사회학교수다. 그래도 신문쟁이에 대한 미련을 거두지 못해 칼럼계에 발을 들여놓기도 했다.

    저널리스트 50년이라면 아마 대한민국에서 예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중앙일보의 김영희 대기자와 함께 유이무삼(有二無三)에 속한다. 김영희 대기자는 자주 뵀기에 조우하지 않은 50년 경력 저널리스트는 김대중 고문이 유일한 셈이다. 50년 경력, 그것도 산업화 초기부터 시작해 대한민국을 이 정도 성장시킨 모든 사건에 훈수를 둔 사람이 겪고 쓴 ‘글의 시간’에 대한 예의라고 할까.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의 전화를 받고 한동안 망설였지만 결국 글을 쓰기로 한 이유다.

    김대중 고문은 현장기자로서 25년 ‘기사’를 썼고, 1990년 주필로 등극한 이래 격주로 26년 ‘칼럼’을 썼다. ‘기사’는 현장의 긴박함을 그대로 퍼 올리는 글이기에 그렇다 쳐도, ‘칼럼’은 머릿속에서 수십 번 곱씹고 뒤집어 논리의 실타래를 풀어내야 하는 고뇌의 글이다. 그것도 영향력이 막강한 조선일보의 공식적 입장을 만천하에 고하는 주필 칼럼이기에 변명의 여지를 제거해야할 부담감을 안는다. 오로지 문자와 논리로 세상과 대적하는 피 말리는 글을 50년 썼고, 76세에 이른 지금도 변함없는 필치를 휘두르고 있다. 그러니 경외감을 표할 수밖에.

    교수들은 칼럼을 흔히 잡문(雜文)이라 부른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논문이 정식 글이고 신문 글은 잡스런 글, 가끔 자신의 지식과 견문을 앞세워 무지한 독자를 훈계하는 데에나 유용한 격이 낮은 글로 치부하기 일쑤다. 그런 사람일수록 ‘잡문’을 잘 못 쓴다. 정식 글에 자존심을 거는 사람일수록 대중심리와 현실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조선 중기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이익의 '성호사설'이 ‘잡문’으로 이뤄져 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모른다. 이 ‘잡문’은 사실 조선 선비들이 종횡무진 썼던 글 형식 중 논(論), 설(說), 책(策), 부(賦)를 관통하는 공통장르에 해당한다.

    당시 선비들은 자신의 글을 필사해서 동료들에게 전해줬다. 독해 그룹이 작아도 학문의 모든 자존심을 걸고 글을 썼다. 지금은 거의 백만명 독자들에게 전달되고 바로 공론의 소재가 된다. 그러니 잡문이 아니라 가장 영향력있는 글, 가장 힘들게 쓴 글, 가장 변명의 여지가 없는 그런 글이다. 그런 글을 50년 썼다는 뜻이다. 그것도 대한민국이 후진국에서 선진국 문턱에 올라오는 파란만장의 시간대에 말이다. ‘파란만장’이 저널리스트가 가장 반기는 세월이라면, 김대중 고문은 운 좋은 사람이고, 50년 세월을 직필(直筆)로 지켜왔다는 의미에서 ‘직업으로서의 저널리스트’가 무엇인지 보여준 사람이다.

    直筆(직필)의 맛

    나는 김대중 고문의 성격을 잘 모른다. 글에 인격과 성정이 모두 드러난다면, 그의 칼럼으로 미루건대 그의 성격은 매우 날카롭고 직설적일 거라는 짐작이 간다. 그의 동료인 류근일 전 주필이 평가했듯 ‘인간 김대중은 싸움닭이고, 몽니깨나 부리고, 으르렁댄다.’ 그의 글은 ‘직정적(直情的)이고 폭발적인 스타일로 돌격해 들어가는 식’이라는 평가에 필자는 동의할 수 있다. 그의 글은 상대에게 칼을 들이대듯 단도직입적이다. 예의와 체면을 차리지 않는다. 사실 칼럼을 써본 사람들은 이런 류의 직설을 곧장 들이대는 게 어떤 후한(後恨)을 몰고 올지를 안다. 곡학아세(曲學阿世)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예 몸을 사리거나 비판수위를 낮추기 마련이다. 특히 상대가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김대중 고문은 다르다. 일단 그의 심통 맞은 감각에 걸리면 군부든 대통령이든 안중에 없다. 논리와 비판의 칼날만 번쩍일 뿐이다. 2000년 8월, ‘국민의 정부’가 한창 업적을 뽐낼 때, 자신과 동명이인인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썼다. “여기서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김 대통령의 사태를 보는 통찰력과 시국을 판단하는 현명함에 어떤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실성했나?’ 혹은 ‘판단력에 고장이 났나?’였다. 이런 논조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쓴 최근 칼럼에서도 그렇다. “기사를 써도 별 다른 변화가 없고, 쓴소리했다 하면 불쾌한 반응만 들려오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대통령을 ‘마이 웨이(my way)’의, 또는 ‘불통 대통령’이라고 말한다.”(2015년 3월 3일자) 그 칼럼의 제목도 ‘直言의 무게’였다.

    하기야 그 자신의 성정을 뚫고 나온 독설 때문에 산전수전 다 겪었으니 직설(直說)을 곡설(曲說)로 바꿀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는 직접화법으로 전두환 정권에 대들었다가 영국으로 유배를 갔고, 김대중 정권 때 ‘햇볕 정책’을 거들지 않아 언론사 세무조사와 가족들의 계좌추적을 감수해야 했다 (위클리 조선, 2009년 ‘김대중고문의 특별기고’). 어지간하면 필체를 조금 바꿀 수도 있겠으나, 워낙 불같고 타협을 모르는 그의 성정이 에둘러 말하는 간접화법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의 글에는 레토릭도 비유도 없다. 주어와 명사와 서술어가 가지런하게 놓이고, 누가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 분명한 논지가 제시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덤벼보라’는 자신감, 혹자는 오만함이라 표현할 수도 있는 그런 당당함이 특징이다.

    나는 사실 직설 문체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직설로 일관하는 자신감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직설은 항상 필자를 내세워야하고, 필자의 논조는 수정불가라는 도장을 찍어야하기 때문이다. 내 논조가 과연 옳은가? 칼럼니스트들이 항상 고민하는 자기 검열의 질문이 이것이다. 가끔은 자신 없는 문제를 건드려야 할 때가 있고, 혹 자신의 신념이 이데올로기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가를 자문하기 일쑤다. 그래서 비유와 수사를 동원하고, 비판 상대와 닮은 대상과 사건의 유사한 스토리를 앞세워 자신을 숨긴다. 어찌 보면 비겁한 화법이다. 필자가 도망갈 출구를 미리 마련해 놓는 글은 비겁하다. 직설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터득했기에 소도구들을 동원한 비겁한 글을 자주 써온 나로서는 글래디에이터의 번쩍이는 칼같은 김대중 고문의 글이 무섭다. 때론 시원하다.

    독일의 사회학자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글이 무섭고 시원한 것과 비슷하다. 이에 비하면, 막스 베버(Max Weber)의 글에는 저자가 보이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역사적 사례들 속에 필자는 증발하고, 그 수많은 사실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름 명백한 결론의 항구에 당도하는 걸 느끼게 된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이 그랬다. 그의 성정은 올곧기 그지없어서 수사와 레토릭을 빼고 사실과 논리가 가득찬 論, 說, 策 500권 저술을 남겼다. 이에 비하면 동시대 박지원은 자유분방한 글쓰기의 전형이다. 그의 글 역시 호방한 그의 성격과 닮아서 욕설은 물론 화려한 수사와 비유, 다양한 스토리와 인물들이 등장한다. 글의 형식으로 판단하건대, 확신감에 찬 건 마르크스와 같고, 차분하고 정제된 논리로는 다산과 같다. 그는 直筆의 대가다. 공정성은 별개다.

    보수주의 수문장

    조갑제 닷컴에 들어가면 필자에 대한 비판이 만만치 않다. 어떤 때에는 ‘요설의 왕 송호근 교수로부터 배우는 학생들이 불쌍하다’는 글이 실리는가 하면 (조영환의 글), 아예 필방의 주인인 조갑제 선생이 내 칼럼을 일일이 수정하는 수고도 해준다 (조갑제, ‘송호근교수의 중앙일보 칼럼을 읽고’). 개념과 사실의 오류는 물론, 글을 아끼라는 충고까지 다양하다. 나는 이런 관심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나를 뒤돌아보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점이 어긋난 비판이 많다. 비판의 표적은 진정한 내가 아니었다. 나는 좌파로부터 우파논객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극우논객 조갑제는 나를 좌파로 규정했고 거기에 ‘순진한 글’이라고 어른스럽게 타이르기도 했다. 나는 결코 순진한 사람이 아니다. 좌파와 우파를 넘나드니 말이다.

    그 싸이트에 오랫동안 올려 있던 조영환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송호근 사회학과 교수가 중앙일보에 기고한 ‘성은이 망극한’이란 시대착오적 제목의 글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을 조선시대의 왕보다도 더 권위주의적 통치자로 잘못 가정해서 거짓 선동을 했다. 사실을 존중해야 하는 사회학자가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대통령을 ‘비판불가의 왕’으로 잘못 가정하여 까대는 모습이 추하다.” 이게 사실은 보수논객의 수준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둔탁한 감각이자 경직된 신념이다. 이런 인식과 비난들이 판치는 한 보수-진보의 접점은 불가능하다. 진영간 소통을 얘기하지만 자신의 경직된 신념을 확인할 뿐이며, 점잖은 조언조차 모멸의 언어가 되어 꽂힌다. 상대의 이념적 위치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노력이 우선이다. 한국의 보수, 아니 극우는 아직도 한말의 위정척사, 그것도 전성기 성리학을 그리워하는 옹고집들이다. 극좌도 그런 면에서는 다를 바 없지만.

    김대중 고문은 이런 보수를 거느리고 있는 보수주의 수문장이다. 앞의 사례와는 달리, 나는 정확한 사실과 확고한 이념에 근거한 그의 보수주의 논지를 이해하고, 일관성에 가끔 감탄사를 발하기도 한다. 보수진영의 수문장답다. 창간 10주년을 맞는 한겨레신문에 대해 이렇게 조언했다. “나는 '한겨레'가 점차 독선적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잣대만이 정의이며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이념은 그것 자체를 부도덕하고 옳지 않다는 도그마를 지면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특히 대북문제를 보는 시각이다”(한겨레신문에 실린 김대중 고문의 기고문, 1999년 5월 15일자). 맞는 말이다. 한겨레의 둔탁하고 거친 논리를 생각하면 김 고문의 세련된 진보비판은 수준급임에 틀림없다. 진보논객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김고문의 논지를 거꾸로 자신에게 대입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대체로 그 동안의 보수, 진보간 논쟁은 이런 식의 경직된 진영논리로 일관했다.

    나는 서로의 비판논리를 서로에게 거꾸로 돌리는 식의 수준 낮은 논쟁을 혐오한다. 결과는 드잡이 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보수든, 진보든 칼럼니스트에게 이념적 위치선정은 불가피하다. 그렇지 않고는 기회주의자가 되기 십상이고, 논리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균형잡힌 중도가 있을 수 있겠으나, 한국에서 중도는 인기를 끌지 못한다. 중도가 생존할 여론 시장은 매우 협소하다. 중도 칼럼니스트는 항상 경계의 담장을 걷는 신중함과 조바심 때문에 일필휘지하지 못한다. 글발이 시원찮아 소심하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은 미국의 대표적 언론인 제임스 레스턴(James Reston)도 칼럼니스트는 어떤 이념적 지형에 착지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했다. 김대중 고문이 보수영토에 착지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진보라고 그것을 힐난할 수 없고 힐난할 자격도 없다. 다만, 글의 편파성 혹은 공정성이 문제다.

    이데올로기 투쟁에 이골이 났던 1920년대 칼 만하임은 급기야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라는 책을 썼다. 어떻게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그가 던진 이 질문은 이 시대의 칼럼니스트에게는 물론, 이분법적 편가르기에 익숙한 우리가 새겨야할 문제의식이다. 공론장의 분열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만하임의 제안은 ‘그를 과거로부터 이해하라’로 시작한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 그를 격분시키고 위로했던 사건은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기질과 성정, 취향과 선호는 모두 다르고 경험도 제각각이다. 그러니 이념과 발설이 다를 수밖에. 만하임은 자신의 이념적 특성이 밝혀지면 사회집단과 다른 세대로 확장, 비교해보라고 권한다. 상대적 위치를 파악하라는 말이다. 그리곤 그것을 넘어 시대정신의 거시적 면모에 비춰보면 세계관의 지도가 보인다고 했다.

    이 각 단계가 가치중립성(Wertfreiheit)을 확보하는 과정인데 대부분의 지식인은 이런 단계를 거쳐 가치평가적 관점에 도달한다. 즉, 총체적 전망에 대한 자기검열을 동반한 현실적 착지다. 지식인은 하늘을 자유로이 날다가 자신이 선호하는 장소에 내려앉는다. ‘자유부동적 인텔리겐챠’라는 개념이 여기서 나왔다. 자유부동적이기 때문에 ‘종합의 가능성’을 항상 휴대한다. 이념논쟁이 우리처럼 이분법적 대치가 아니라 ‘갈등적 합의’를 낳게 되는 인식론적 조건이 이것이다.

    김대중 고문의 보수성향은 멀리는 조선시대 광산 김씨의 가계로부터 이어지는 노론 벽파의 정신적 계보와 연결되어 있고, 가깝게는 와세다대학에 유학해 돌아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던 부친에 대한 인류학적 저항과 접속한다. 확인한 사실은 아니지만 그렇게 추측된다. 그의 철저한 반공의식은 초등학교 시절 김천에서의 피난경험과 월남한 천재들이 다녔던 서울고등학교에서의 세대경험에 기초할 것이고, 그것은 1970년대 미국 특파원 시절 목격했던 자유민주주의에 의해 더욱 다져졌을 것이다. 동명이인 정치인 김대중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던 이유도 이것이었고,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던 배경에도 이런 경험이 내재해 있다. 그렇다고 신군부를 온전히 신뢰했던 것도 아니었다. 철저한 보수주의에 입각한 그의 일관된, 그리고 때로는 너무 단호한 논조가 가끔 시대와 불화를 낳기도 했고 필화(筆禍)를 일으켰던 이유다.

    칼럼니스트들에게 자주 뒤집어 씌웠던 색깔론을 변명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더욱 철저히 밀어붙이라는 역발상도 여기서 나온다. 그의 색깔은 진하고 선명하다. 다만, 대한민국에 대한 ‘국가관과 역사 정체성이 확고하다면’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대한민국 헌법체제의 수호를 위해서라면 종북, 친북주의자들의 색깔 검증은 반드시 필요한 국민적 과제이기에 보수진영은 색깔론 역공에 주눅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과감한 주장은 보수진영의 갈채를 받았지만, 전광석화처럼 해치워버린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이 몰고 온 파장을 덮지는 못했다. 절차적 심의 과정이 정치적 외압에 의해 단축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던 신중론자들조차 김대중 고문의 이런 단호한 입장 앞에서는 ‘소심증?’이란 자가 판정을 강요당하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북한 핵 견제에는 남한 핵무장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그의 주장도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고다. 이런 단호한 편파성이 여러 입장을 종합하는 전망주의적 검열을 거친 말인지 따져봐야 하지만 평소의 지론과 소신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파놓은 이념의 참호에는 보수진영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진보진영에 대한 ‘한없는 의구심’이 장착되어 있다. 역대 대통령들도 그의 참호에서 발사된 글의 포화를 감당해야 했다.

    대통령 저격수

    대통령 당선자들은 기뻐하기 전에 우선 김대중 고문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어떤 필설이 발화될지, 그래서 세간의 평가가 어떻게 달라질지가 궁금하다. 김대중 고문은 대통령 저격수다. 물어뜯는 데에 당할 선수가 없다. 진보성향 대통령들은 마구 물어뜯고, 보수 진영 대통령들은 잘근잘근 씹는다. 진보에 대해서는 과(過)에 무게를 싣고, 보수에는 공(功)에 더 뜸을 들인다. 그의 타고난 성정, 그리고 칼럼니스트로서의 이념적 성향인 애정과 의구심이 적진의 색깔에 따라 확실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의 포화에 가장 고생한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과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는 아예 이들의 당선 초기부터 비판과 경계의 화살을 쏟아 부었는데, 화력은 집권 기간 내내 결코 소진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너무 거세 진보인사들로부터 ‘DJ 죽이기’로 나선 것 아니냐는 거센 반감을 샀다. 그는 사실 ‘DJ 죽이기’의 수장이었다. 당선 초기부터 톤이 높아진 그의 논조는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즈음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한국을 자신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사유화 정치’를 하지 말라고 말이다. 정치인생의 모든 것을 거기에 건 듯한 노(老)정치인의 모습에서 위험을 간파한 것이다. 대통령의 마음 속에 어른거리는 노벨상에의 갈망이 결국 북한과 김정일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대북 노이로제를 낳았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갈파했다. “이 나라가 어떻게 싸워서 일군 나라인데 이렇게 줏대 없이 북에 끌려 다니며 온갖 사탕발림에 열중하고 있는가 하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또는 “어느 전직 대통령은 그를 향해 ‘독재자’라고 까지 극언하고 있다.” 6·25 전쟁 이후 처음 열린 방북길이 혹시 나라의 자존심을 통째로 매도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이런 경고에 대해 진보진영은 분노로 들끓었다. 안티조선운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자신의 스파링 파트너 정도로 여길 만큼 논조가 더욱 거세지고 거침이 없었다. 김대중 고문은 아예 노대통령을 제대로 된 정치인 취급을 하지 않았던 흔적이 여기저기서 돌출된다.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게임이고 기술’이라든가, 노대통령의 마지막 작품인 평양방문을 ‘노무현쇼’라고 폄하했던 게 그 증거다. 그가 보기에 노대통령은 이분법의 대가였다. 편가르기의 달인, 원칙을 비껴난 달변가, 편법과 술수에 능한 사람이었다. 노대통령에 대한 심한 반감은 ‘반미(反美)면 어때?’라는 농담조 진담에서 격발되었다.

    자주외교, 균형외교의 필요성을 강조한 ‘반미면 어때?’라는 이 발언만큼 보수주의 수문장의 심경을 건드렸던 말은 없을 것이다. 사실이 그랬다. 보수논객에게 반미는 대한민국의 탄생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화가 난 김대중 고문은 아예 2007년 12월 대선 정국에서 우파를 독려하는 글을 실었다. 제목은 “우파냐 좌파냐의 선택이다”였지만, 우파를 향한 행진곡풍의 독려가 가득 찬 글이었다.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와 좌파 등 모두에게 빚을 갚고 ‘빚 없는 흑자시대’로 건너가는 당시 대선을 코 앞에 두고 ‘우파의 신조’를 차근차근 점검했다는 것 자체가 편파적 선거운동 혐의를 받을 만 했지만, 불법(不法)은 아닌 게 칼럼니스트의 특권인 걸 어쩌랴. 그로부터 이명박과 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 10년이 열렸다.

    그렇다고 해서 김대중 고문의 글발이 누그러진 것은 아니다. 애정이 깊을수록 실망도 커지는 법, 원칙과 철학이 없고, 파벌싸움이 격해지고, 무기력증에 빠진 집권당의 모습이 한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논조는 집권 3년차에 거의 ‘기대소진’을 발하는 점에서 공통이다. 이명박 정권 3년차에 쓴 칼럼, ‘보수는 보수다워야 한다’에서 그는 “무엇보다 우파는 국민에게 국가의 정체성을 각인시키고 안보의 막중함을 인식시키는 데에 실패했다”는 자신의 성정을 씁쓸하게 확인해야 했다.

    박근혜 정권도 사정은 같았다. 불통정권에다가 ‘전(前) 정권 손보기’라는 고질병에 걸린 현정권의 앞날이 걱정스러워진 거다. 그는 3년 차에 접어든 요즘 칼럼에서 무섭게 말했다. “공화국 건국 이래 70 여 년간 권력에서 물러난 후 제대로 살아남은 대통령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는 정권을 차지한 승자가 선거의 패자에게까지 보복의 칼질을 했던 것이 우리 정치사다. 결국은 박정권도 세월이 지나면 ‘피의자 입장’에 설 수도 있다는 말이다” (前 정권 손보기, 2015년 4월 14일자). 그는 이런 영욕의 세월을 지켜본 현장 언론인이자 매 정권마다 그런 교훈을 환기시켰던 교사였다. 최고의 대통령 저격수였지만, 저격의 목적은 대한민국 살리기였다. 그게 비록 ‘당신이 그리워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비난의 폭풍을 몰고 왔고, 거친 진보논리에 대항하여 더욱 거칠고 단호한 논법을 동원했다는 오류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일관된 50년을 버텨온 보수주의 수장의 뚝심은 알아줄만 하다.

    뚝심있는 언론인

    20세기 한국을 끌어온 것은 언론인, 교육인, 종교인이었다. 교양시민의 대명사인 이 그룹은 산업화와 민주화로 이어진 한국정신의 등불이었다.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이념갈등이 격화될 때는 어른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그런데 어른은 실종됐다. 어른없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뭐라 잔소리 들을 일 없어 편하기도 하지만, 무게있는 훈수, 따끔한 질책도 그리워지는 법이다. 말과 글을 믿을 수 있는 사람, 판단을 내려주는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쓸데없는 정보들이 난무하는 SNS 시대, 사소한 소식들이 인식공간을 뒤덮는 정보화 시대에 신뢰할 인물과 조우하고 진짜 고뇌에 찬 글을 접하는 것은 즐거움이자 배움이다. 한국에는 그런 글쟁이가 드물다.

    5월 22일, 미국에서 33년 동안 6028회 심야토크쇼를 진행한 데이비드 레터맨이 종방을 했다. 이별의 눈물은 나의 장례식을 위해 아껴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왜 우리에겐 이런 사람이 없는가. ‘뉴스의 전설’ 월터 크롱카이트, 미국 CBS 방송 대표 앵커였던 그는 ‘불확실한 시대에 확신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60~70년대 미국인들은 월터가 전하는 ‘30분간의 진실’을 듣기 위해 저녁 밥상에 모여 앉았다. 그가 전하는 뉴스에서 현실을 깨닫고 그의 말투와 표정에서 해석의 실마리를 얻어냈다. 보도국 기자들이 써대는 각종 기사들은 그의 손을 거쳐 진짜 뉴스로 만들어졌고, 그의 목소리에 실리면 장안의 화제가 됐다. 앵커란 ‘해무(海霧) 속의 등대’와도 같은 존재다.

    레터맨, 크롱카이트, 그리고 레스턴도 이념적 위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언론방송인의 운명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념적 색깔이 사실과 근거를 침범하지 않도록 유의한다면 공정성에 한층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이념의 골짜기를 제대로 통과하지 못한 한국에서는 이념적 선명성이 언론인의 영향력을 좌우하는 요인이다.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 세대원이 많을수록 이념적 편향성은 강한 영향력의 자원이다. 김대중 고문이 2004년까지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인’ 1위를 고수한 것도 세대원의 열광과 지지 덕분일 것이다. 다시 말해 지난 50년은 김대중 고문의 시대였다.

    2004년 이후, 1위 자리를 손석희 앵커에게 내준 것은 인구학적 변화 때문이다. 인구변화는 이념지형을 바꾼다. 김대중 고문의 글을 사랑했던 ‘김사모’ 집단의 인구 규모가 자연스럽게 줄어든 것이고, 시대정신의 중추가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그의 글에 대해 더 많은 비난과 더 거센 반발이 증폭하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다. 그렇다고 변신할 필요는 없다. 정치인은 기회만 있으면 변화와 개혁을 주장하지만, 칼럼니스트에게 변신은 죽음이다. 사망선고다. 착지한 그곳에서 무덤을 파야 한다. 다만 글이 선동(煽動)이 되지 않으려면 동시대인의 삶과 현장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예전, 현장기자 김대중의 명성을 날리게 했던 갱부 양창선 매몰사건을 보도할 때처럼, 그의 빛나는 칼럼이 현장의 생생한 드라마와 감각을 싣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연로(年老)란 현장에서 추상(抽象)으로의 귀의를 재촉한다. 흔히 추상 속에는 자기의식이 더 승하기 마련이다.

    줄잡아 약 2000편이 넘는 기사와 칼럼을 써온 김대중 고문, 그의 글발과 논조에 변함이 없는 것은 다행스런 일인데, 영향력은 쇠퇴하고 있다. 그러나 50년을 지켜온 뚝심있는 언론인을 가졌다는 것은 독자에게는 행(幸)이다. 송건호, 김중배같은 언론인이 살아 있었다면 진보진영의 행(幸)이었을 것이다. 어른없는 시대에 50년 세월이 어딘가? 종이신문의 영향력도 동시에 퇴장하고 있는 오늘날의 추세로 보건대, ‘언론인 50년’ ‘글쟁이 50년’의 역사는 잘 깨지지 않을 것이다.

    ◎송호근 교수는?

    서울대 사회학과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림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있다. 보수나 진보 어느 한 편에 서지 않는 ‘자유부동(自由浮動)’의 지식인을 자임한다. 글 잘 쓰는 칼럼니스트로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공개 강연에서 집권 세력을 향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그만 부르라”고 쓴소리를 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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