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 선임기자

편지 한 통이 그를 일깨웠다. 김동연(金東兗·58) 아주대 총장이 기획재정부 2차관이던 시절의 일이었다. 옛 강원도 춘성군 동산중학교 선생님이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전교생이 21명뿐입니다. 어렵게 성공하신 차관께서 꿈을 잃은 제자들에게…."

얼마 뒤 김동연이 그 학교를 찾았다. 스물한 명에게 각기 다른 책 한 권씩을 선물로 싸들고 갔다. 한참 이야기하는데 학생들이 하나둘 흐느끼더니 이윽고 학교 전체가 울음바다가 됐다. 김동연의 뿌옇게 변한 눈시울에 열한 살 때 제 모습이 비쳤다. 그때 미곡상 하던 아버지가 숨졌다. 서른셋 젊은 나이였다. 간질환으로 지친 몸이 심장마비에 무너져버렸다. 남은 것은 한 살 아래 아내와 4남매였다. 초등학생이던 김동연은 그때 '천붕(天崩)', 즉 하늘이 무너지는 게 뭔지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서울 신당동 양옥집에서 쫓겨나 일가는 청계천 7가 판자촌으로 떠밀려갔다. 청상(靑孀) 어머니에 기대 겨우 연명한 게 그나마 행복인 줄 가족은 몰랐을 것이다. 개천을 뒤덮은 집들이 헐리자 그들은 경기도 광주, 지금의 성남 단대동 벌판으로 내몰렸다.

초등학교 입학 전 고향인 충북 음성을 떠날 때만 해도 소년은 청운(靑雲)의 꿈을 꾸었다. 몇 해 만에 그는 차꼬와 수갑 찬 것 같은 신세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 게 제 팔자이며 '개천에서 난 용(龍)'이 되지 않는 한 굴레를 벗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광희초등학교와 광희중을 거쳐 김동연은 명문(名門) 덕수상고에 들어갔다. 6개반 중 1개가 진학반이었는데 그는 "취업반 성적이 더 좋았다"고 했다. 외할머니·어머니·동생들을 부양해야 했기에 대학 대신에 직장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아쉬움을 그는 그렇게 말했다.

졸업 후 서울신탁은행에 들어간 그는 국제대 야간에 다니며 공부를 계속해 1982년 행정고시와 국회사무관 시험에 동시 합격했다. 1950년대 후반에 태어난 가난한 베이비붐 세대의 전형적인 출세 행로(行路)였다. 그래서 그는 '용'이 됐을까. 열일곱 나이에 은행 본점에서도 핵심 보직인 신용조사부에서 일했지만 '고졸'이란 장벽이 그를 막아섰다. 양대(兩大) 고시에 합격하자 이번엔 'SKY 출신이 아니다'라는 질시를 그는 느꼈다. 상고(商高)와 야간대 출신인 그는 영원한 비주류였다.

역경(逆境)에 굴하면 젊음이 아니며, 오기(傲氣)가 없으면 청춘이 아니다. 김동연은 풀브라이트장학금을 받고 미국 미시간대학으로 향했다. 비(非) SKY 출신으론 서강대 외에 그가 처음이었다. 지식에 대한 오랜 갈증을 푼 그는 일에 매진했다.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시작해 기획재정부 사회재정과장, 재정협력과장, 재정정책기획관, 청와대 금융비서관, 기재부 예산실장, 제2차관을 거친 김동연은 마침내 국무조정실장을 지내다 지난해 7월 공직을 떠나 아주대 총장으로 부임했다.

이렇게 숨 가쁘게 달려오기까지 그를 뒷받침한 것은 1977년 은행에서 만난 동갑내기 아내였다. 김동연이 군에 갔을 때 고무신을 바꿔 신지 않았던 아내는 그가 고시에 합격한 지 1년 뒤인 1983년 결혼했다. 6년의 연애 끝에 부부가 된 것이다. "고시 붙은 후 유혹이 많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김동연은 "고생한 의리 때문에 딴맘을 품은 적이 없다"고 했다.

여기까지라면 질주한 말(馬)에게 당근을 상(賞)으로 내리듯 평생을 달려온 그를 달콤하게 위로하고 작별을 고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왜 이젠 개천에서 용을 볼 수 없는가. 용을 보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대답할 틈도 없이 김동연은 백지 한 장을 펴더니 볼펜으로 핀(Pin) 10개를 그렸다. 그러더니 "이걸 한 번에 쓰러뜨리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하고 물었다. 묵묵부답이 된 기자를 앞에 놓고 그는 5번 핀, 즉 킹핀(King Pin)을 겨냥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사회는 이제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구조가 됐습니다. 진입장벽 때문입니다. 양극화·성장률 하락 같은 문제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게 신분의 이동성을 높이는 겁니다." 말이야 옳지만 어떻게 다시 개천에서 용을 부화한다는 것인가.

그는 내 심중을 뚫어보듯 미소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유쾌한 반란'을 학교에서 일으키고 있어요. '그 친구를 보내자'는 프로그램인데 미국 미시간·존스홉킨스대(각 30명)와 중국 상해교통대(20명)에서 한 달 동안 집중 훈련을 시키는 거죠." 이 프로그램은 고달픈 현실에 좌절한 젊은이들을 친구가 추천해 해외로 보내는 것이다. '내'가 아닌 '네가 먼저'이며, 문호도 도내 타 대학생에게도 개방됐다. 성적보다 의지를 우선해 대상자 선발도 오랜 시간 면접을 해 정한다. 그는 '아주 희망 SOS'라는 네트워크도 개설했다. SOS는 '우리 학생을 구하자(Save Our Student)'의 약자다. 부모의 실직이나 질병 같은 어려움에 처한 학생이 도움을 청하면 월 60만~100만원을 기한 없이 지원하는 제도인데 1주일 만에 17명이 도움을 받았다.

나는 역술가가 아니어도 그가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렇게 힘껏 살았는데도 하늘은 안타깝게도 대학에 다니던 그의 큰아들을 앗아갔다. 백혈병으로 아들이 숨진 다음 날, 그는 TV 앞에서 원전(原電) 비리 대책을 발표해야 했다. 대체 그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