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의도? 100년 전 비극 추모한 것뿐"

조선일보
  • 김기철 기자
    입력 2015.05.18 03:00

    [무대에서 1차대전 학살 고발한 첼리스트 하크나자리안 인터뷰]

    14일 예술의전당 앙코르 곡서 아르메니아 학살 100주기 추모
    터키 청중 "정치 발언 말라" 소동

    "先代 가족 중 학살 희생자 있어"

    첼리스트 나레크 하크나자리안이 14일 밤 서울예술의전당에서 100년 전 아르메니아 학살을 추모하는 앙코르 곡을 연주하고 있다.
    첼리스트 나레크 하크나자리안이 14일 밤 서울예술의전당에서 100년 전 아르메니아 학살을 추모하는 앙코르 곡을 연주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정치적 의도는 무슨? 100년 전 학살의 비극을 기억하고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자는 뜻밖에 없었다."

    14일 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아르메니아 출신 첼리스트 나레크 하크나자리안(27)은 상기된 표정이었다. 이날 밤 그는 서울시향과 차이콥스키의 야상곡·로코코 변주곡을 협연했다.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인 하크나자리안은 정확하면서도 힘 있는 연주로 청중의 환호를 받았다. 앙코르 요청을 받은 하크나자리안이 무대에 다시 나왔을 때만 해도 정성껏 차린 코스 요리를 맛있게 즐긴 포만감으로 느긋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소동이 일어났다.

    "오늘 앙코르는 저와 (조국) 아르메니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곡입니다. 올해는 '아르메니아 학살' 100주기이고, 당시 희생당한 150만 아르메니아인을 위해 앙코르를 바치겠습니다." 하크나자리안이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1층 객석 가운데서 영어로 "정치 얘기는 하지 말라(Don't talk about politics)"는 고함이 터져나왔다. 청중으로 온 터키인 남자가 항의하는 소리였다. 첼리스트는 잠시 멈칫했다. 어리둥절했던 청중은 이 터키인이 하크나자리안의 말을 계속 방해하자 "당신이나 입 닫아"라고 맞받아쳤고, 박수로 앙코르를 청했다.

    하크나자리안은 다시 활을 잡았다.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위로하듯 구음(口音)을 곁들인 애절한 선율이었다. 이탈리아 첼리스트 겸 작곡가 조반니 솔리마가 1998년 작곡한 '라멘타치오'(Lamentatio·애도)였다. 5분 남짓한 연주가 끝나자 청중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1차대전 당시 터키 전신인 오스만튀르크 제국에서 150만명(아르메니아 추산)이 학살된 아르메니아인들의 비극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유럽 의회와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아르메니아 학살 100주기를 맞아 아르메니아의 비극을 유태인 학살과 같은 '제노사이드(genocide·대학살)'로 규정했다. 하지만 책임자로 지목된 터키는 여전히 사건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공연 직후 무대 뒤 독주자 대기실에서 만난 하크나자리안은 "내 할아버지 가족들도 그때 산 채로 불에 타 돌아가셨다. 2차 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보다 앞서 있었던 20세기 첫 학살이 아르메니아 학살"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4월 24일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서 세계 44개국에서 온 음악인들이 학살 100주기를 추모하는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가졌다. 나 개인적으로 올해 연주는 모두 이 사건을 추모하는 데 헌정하겠다"고 했다. 하크나자리안은 런던 심포니, 시카고 심포니 등과 협연하면서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기대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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