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12년 만인 2002년, 독일 경제는 완전히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2001년 독일의 실질 GDP 성장률은 1.2%에 불과했고, 실업률은 9.4%를 기록했다. 따라붙는 수식어는 '유럽의 병자(病者)'였다. 1998년 집권한 좌파 정부는 침몰하는 '독일호 개혁'의 선장에 대기업 임원을 임명했다. 바로 독일 자동차 회사인 폴크스바겐그룹의 페터 하르츠(Hartz·74) 인사 담당 이사였다. 1990년대 내내 폴크스바겐의 구조조정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하르츠의 전문성이 빛난 노동개혁은 요즘 들어 독일을 '유럽의 기관차'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공업·소규모 사업장은 해고 규정에서 예외를 인정해줬고, 신규 창업 기업은 임시직 근로자를 최장 4년간 고용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실업급여 기간을 대폭 축소하고 구직 노력자에게만 실업급여를 지급했다. 덕분에 지난 1월 집계한 독일의 실업률은 4.7%로 통일 이후 최저치였다. 올해 독일의 GDP 성장률은 2%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달 19일 열리는 제6회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에 참석하는 하르츠 전 위원장은 ALC 둘째 날인 20일 오전 9시 '하르츠에게 듣는 노동시장개혁' 세션에서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진행으로 이기권 고용노동부장관과 대담한다. 한반도 통일 후 일자리의 미래 등에 대해서도 논의할 예정이다. 그는 10일 본지 인터뷰에서 "성공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올바른 비전과 이 비전을 성공시킬 수 있는 힘 있는 리더, 뒷받침할 수 있는 재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대기업 임원에서 정부의 노동개혁위원장으로 발탁된 이유는.
"폴크스바겐 그룹 이사회에 참여했던 슈뢰더 전 총리는 1990년대 내가 주도했던 폴크스바겐그룹의 구조조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노동개혁위원회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해 기꺼이 수락했다."
―폴크스바겐에서 실행했던 주요 구조조정 내용은.
"1990년대 독일 기업 상당수는 인력 과잉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폴크스바겐 역시 인력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10만명 중 3만명이 구조조정 대상이었다. 그렇다고 3만명을 해고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도를 도입했다. 아무도 해고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 4일 근무제를 도입한 것이다. 근로자들은 주 5일 근무 때보다 임금이 낮아졌지만, 고통 분담 차원에서 받아들였다. 사측으로서는 근로자들이 만족하지 않는 조건이라도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감수할 만한 조건을 내놓았다고 판단했다. 근로자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하르츠 개혁'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던 비결은.
"정부는 많은 반대에도 일관되게 개혁을 추진했다. 덕분에 노동개혁위원회는 2002년 2월 활동을 시작해 같은 해 8월 의회에 법안을 제출했고, 연말에 법이 모두 통과됐다. 이후 2년 동안 개혁은 단계적으로 이뤄졌다."
―개혁 성공 사례를 소개한다면.
"예컨대, 자녀가 3명이고 아내가 아픈 가장은 주거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할 수 없지만, 혼자인 싱글은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 가서 일하라고 할 수 있다. 2002년 당시 실직자가 400만명이었는데, 기업들은 100만개 일자리에 사람을 못 구해서 아우성이었다. 일자리가 있는데도 멀다고 안 가는 구직자에게는 수당을 줄였다. 그랬더니 실직자가 많이 줄어들었다."
―하르츠 개혁 때문에 일자리의 질이 떨어지고 양극화가 심해졌으며, 복지 혜택이 줄었다는 비판이 있다.
"많은 비판이 뒤따랐지만, 결론적으로 개혁은 성공했다. 노동개혁이 성공하려면 직업 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이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근로자들을 막다른 길로 내몰아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도 하르츠 개혁을 벤치마킹한 노동개혁이 화두이지만, 노·사·정 협의체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 매우 강하고 성공적인 국가이며 높은 교육 수준을 가진 부지런한 국민이 있는 나라다. 노사 모두 '원하지 않는 조건이라도 최악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대화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감수할 수 있을 만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르츠 개혁'… 복지혜택만 챙기는 실직자 과감히 축소
독일 정부는 2003년 노동시장·산업·조세·교육·환경 등 광범위한 사회 개혁 정책인 '어젠다 2010'을 발표했다. 이 정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하르츠 개혁'으로 불리는 노동시장 개혁이다. 폴크스바겐 인사 담당 이사였던 페터 하르츠가 위원장을 맡은 노동개혁위원회는 2002년 2월 여야 정치인·기업인·노조·학자 등 15명으로 출범해 그해 8월 '하르츠I~Ⅳ'라는 4개의 법안을 만들어냈다. 독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사회적 개혁 작업이었다.
하르츠법은 구직자의 유형을 나눠 실업급여를 다르게 지급하는 한편, '부당해고 금지규정' 적용 기업을 기존 5인에서 10인 초과 사업장으로 확대해 적용 대상을 줄였다. 또 아르바이트나 부업 등 저소득 취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세금과 사회보장세 면제 범위를 확대했고, 실업자들이 창업할 수 있도록 연소득 2만5000유로까지는 세율을 19.9%에서 10%로 인하했다. 즉, 노동 능력이 있음에도 일자리를 찾지 않고 복지 혜택만을 누리려는 실직자를 줄이는 게 개혁안의 골자였다. 이 같은 정책에 대해 당시 노조 측은 물론 집권 사회민주당(SPD) 내부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쏟아졌지만, 하르츠는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하르츠는 사아브뤼켄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여러 중소기업에서 노무 문제를 다루다, 1993년 폴크스바겐그룹 인사 및 노무 담당 이사가 됐다. 이후 그는 90년대 중반 경영 위기에 봉착했던 폴크스바겐에서 근로시간을 줄이되 한 명도 해고하지 않는 방식으로 노사 합의를 이끌어내 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