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9일(현지 시각)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연방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했다. 아베 총리는 연설에서 "과거의 적(敵)이 오늘의 친구가 되었다"며 "자유 세계 제1, 제2 민주주의 대국을 연결하는 동맹"이라고 말했다. 미국을 제1의 민주주의 국가, 일본을 제2의 민주주의 국가로 비유한 것이다. 그는 "(미국의 입장을) 철두철미하게 지지해나갈 것"이라고도 했다. 이날 아베의 연설은 미·일 신(新)밀월 시대의 개막을 선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베 총리는 연설에서 "(2차 세계대전) 전후 일본은 전쟁에 대한 통절한 반성을 가슴에 새기고 걸어왔다"는 말로 미국을 상대로 벌인 태평양전쟁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나 일제(日帝)가 아시아에서 일으켰던 침략 전쟁에 대해서는 "아시아 여러 국민에게 고통을 안겨준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았다"고 짤막하게 언급했을 뿐이다. 미국을 향해 전쟁에 대해 사과하면서도 정작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아시아 국가들을 향해서는 '사과'나 '반성'이란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아베 총리가 이런 태도를 취할 것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일이다. 아베는 방미를 앞두고 줄곧 일본군위안부나 과거사 문제가 나오면 말을 빙빙 돌리거나 애매한 표현으로 넘어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대표적인 사례가 위안부 문제이다. 그는 얼마 전부터 일제가 강제 동원했던 위안부들을 '인신매매 피해자'라고 표현하기 시작하더니 이번 방미 기간 내내 똑같은 말을 거듭 썼다. 범죄를 저지른 주체(主體)를 쏙 빼놓는 방식으로 단지 인신매매의 피해자인 것처럼 몰고 간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베 총리는 28일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함께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담화에 대해 "고노담화를 개정할 의도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작년 6월 고노담화 재검증 작업을 벌여 '위안부 모집과 이송, 관리가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강압에 의해 이뤄졌다'는 핵심 내용이 마치 한·일 간 정치적 협상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주장했다. 일본군이 중국과 동남아 일대의 광범위한 주둔지에 위안소를 설치하고 운영비를 지급했다는 사실을 감추고 마치 민간 업자의 범죄라는 식으로 책임을 피해가려는 속셈을 드러낸 셈이다. 이런 정치 지도자를 상대해야 하는 것은 오늘의 대한민국에 주어진 숙명이자 불행이다.
그러나 우리 외교가 맞닥뜨린 훨씬 중요한 과제는 이번 아베 총리 방미(訪美)를 통해 완성된 미·일 신동맹 시대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미·일 정상은 이번에 양국 동맹 관계를 전면적으로 확대·강화하는 내용의 '공동비전성명'을 발표했다. 미·일이 손잡고 군사와 경제 양면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압박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두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힘이나 강압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 변경을 시도해 주권과 영토의 일체성을 해치는 행동은 국제 질서에 대한 도전이 되고 있다"고 했다. 중국이 일본과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서 군사행동을 할 경우 미·일 두 나라가 연합 대응하겠다는 뜻이다. 이 방침은 중국과 분쟁 중인 필리핀·베트남 등지의 남사군도 도서(島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를 위해 미·일은 18년 만에 '미·일 방위력지침(가이드라인)'을 고쳐 일본 자위대가 미군의 군사행동을 세계 어디에서도 지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런 미·일 동맹 강화가 중국을 포위·고립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미국이 이번에 70년간 일본에 남아 있던 '전범(戰犯) 국가'의 낙인을 지워주고, 아베 총리에게 최상급 환대를 한 것에는 일본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전략이 담겨 있다. 우리로서는 정말 바람직하지 않은 미·일과 중국 사이의 패권 다툼 구도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베 방미가 한국 외교에 던진 최대 숙제가 바로 이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여름쯤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한·미 동맹을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동시에 한·중 관계 역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한국 외교가 지난 2년여의 무능(無能)과 무기력에서 깨어나 국가 생존 전략을 세우고 이를 행동으로 옮겨 나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