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생각', 면도날로 잘라 버려라

조선일보
입력 2015.04.25 03:00 | 수정 2015.04.25 11:08

'지구 최강 지식인' 데닛
"로봇뿐 아니라 인간도 '도구'… 생각의 중심은 뇌가 아니라 우월한 '의식'이 선택되는 것"

'직관 펌프, 생각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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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 펌프, 생각을 열다|대니얼 데닛 지음|노승영 옮김|동아시아|592쪽|2만2000원

맨 뒷페이지의 큼지막한 문구(文句)가 당신을 유혹한다. "지구 최강의 지식인이 건네는 77가지 상상력과 집중력 단련 도구."

와, 그렇다면 이 책을 다 읽은 뒤에는 상상력과 집중력의 달인이 되는 건가. 게다가 저자인 터프츠 대학 철학과 대니얼 데닛(73) 교수는 '지구 최강의 지식인'(서울대 자유전공학부 장대익 교수의 命名)이라지 않은가.

데닛의 문체를 빌리면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낚이지 않으려면 눈을 부릅뜰 것. 미안하지만 이 책은 '자기 계발서의 철학적 확장'이 아니다. 물론 마지막 페이지까지 정독을 마쳤다면, 덤으로 사유(思惟)와 논증(論證) 능력 배가를 가져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은 "지난 100년간 철학과 과학 분야에서 가장 뜨겁고 커다란 질문에 대해 데닛이 정교하게 갈고 닦은 대답"(뉴욕타임스)이다. 그 질문은 결국 이렇게 압축된다. 마음은 탐구 불가능한 영역인가. 과학과 철학이 아무리 용을 써도 세상 마지막 날까지 도저히 이해 못할 거라는 궁극의 신비, 인간 의식은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는가.

다시 데닛으로 돌아오자. 그는 신경과학, 분자생물학, 인공지능, 컴퓨터학, 진화생물학, 그리고 문학으로 무장한 예외적 철학자다. 뇌를 주제로 한 토론에서 노벨상을 받은 신경과학자 존 에클스의 입을 쩍 벌어지게 하고, 자기 학생들에게는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 작성법을 직접 가르치는 철학자다.

우리의 의식을 통제하는 '뇌'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을 통제하는 '뇌'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심이 없다는 뜻이다. 의식은 네트워크 병렬처리의 연속. 어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보다 더 잘 기억되며, '선택'되면 그 녀석이 살아 남는다. /동아시아 제공
마음과 의식을 이해하려던 이론가들은 지난 수천년 동안 뇌의 통제실을 차지하고 앉아 온갖 똑똑한 일을 해내는 난쟁이(라틴어로 호문쿨루스)의 존재를 상상해 왔다. 한 마디로 뇌가 생각의 주체라는 것이다. 하지만 데닛은 그런 '중심'(혹은 기계속의 '넋')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감각의 요소가 집결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그런 '뇌'는 없다는 것. 대신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메커니즘이다.

물질과 육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생각이나 의식 역시 그런 '선택'의 과정을 따른다. 신경과 신경의 네트워크 속에서 생각의 조각들이 분산 병렬 처리되는 가운데, '자연선택'의 과정을 거친 우월한 '이야기'가 채택되고 다듬어진다는 자연주의적 관점이다.

데닛은 이 책에서 무려 77가지 '생각 도구'를 이용해 이론을 펼쳐나간다. 보르헤스나 도스토옙스키까지 포함하는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인용과 문체인데, 그중 '거대 로봇'의 비유를 소개한다.

데닛의 기본적 생각 도구 5
당신이 25세기 삶을 구경하고 싶어졌다고 가정하자. 당연히 동면(冬眠)이 필요하다. 하지만 건물 지하에 보관된 캡슐에 들어갈 수는 없는 법. 400년이나 남았는데, 도시 재개발 때문에 통째로 건물이 헐릴 수도 있다. 결국 안전한 선택은 '이동식 시설물'을 설계해 들어가는 것이다. 자신의 위험도 헤쳐나가야 하지만, 이 이동식 시설물의 근본 목적은 인간 신체의 보호와 에너지 공급. 이 녀석을 '거대 로봇'이라 부르자. 거대 로봇은 본래적 지향성(指向性)은 없지만, "인간의 신체를 보호하고 에너지를 제공한다"는 파생적 지향성을 지닌다.

이 대목에서 진화생물학의 최근 성과를 떠올려보자. 인간 역시 유전자를 보호하고 에너지를 제공하는 생존 기계라고 정의 내리지 않았나. 로봇은 본래적 목적이 없고 파생적 목적뿐이라고 폄하하면서, 인간의 의식이나 마음만 본래적이고 고유한 존재라고 주장할 수 있나. 로봇이 인간을 위해 일한다면, 우리 역시 유전자를 위해 일하는 셈이 되지 않는가.

예매율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이번 주 화려하게 출발한 영화 '어벤져스'에는 새로운 인공지능 '울트론'의 존재가 등장한다. 울트론 메커니즘의 이론적 토대가 궁금한 관객 역시 이 책을 펼칠 일이다. 인간의 의식이나 인공지능의 의식이나 마찬가지. 천재 중의 천재인 지적 설계자로부터 아래로 흘러내려온다는 하향식 관점이 아니라, 맹목적이고 무목적적인 순환 과정이 점점 더 적절한 조합을 실험하다가 스스로 복제를 시작하고, 최상의 조각을 거듭 재사용하여 설계 과정을 가속한다는 상향식 이미지가 데닛 주장의 핵심이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한 노승영씨가 정밀하고도 감각적인 번역으로 독해를 돕고 있지만, 이 '지구 최강의 지식인'을 상대한다는 건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 어떤가. 궁극의 신비에 도전해 보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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