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현 베이징 특파원

지난달 타계한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는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에 뿌리를 둔 화교(華僑)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중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교육받았으며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4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지만 중국어는 그다지 유창하지 못했다. 1978년 11월 싱가포르에서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을 처음 만났을 때도 영어로 말했다. '덩샤오핑 평전'을 쓴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이는 리콴유가 싱가포르에 충성을 다하는 지도자로서 화교 출신이라는 배경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적었다. 싱가포르는 인구의 75%가 화교다.

리콴유가 사망하자 중국 관영 매체는 '중국의 라오펑유(老朋友·오랜 친구)'라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평가를 인용해 그를 애도했다. 실제 리콴유는 1976년 5월 베이징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을 만난 이후 39년 동안 33차례나 중국을 방문했다. 마오쩌둥부터 시진핑까지 중국 최고지도자를 모두 만났다.

중국은 중국통(中國通)이면서 서방통(西方通)인 리콴유에게 '중국의 메신저' 역할을 부탁했다. 1978년 덩샤오핑은 이듬해 1월 미국 방문을 앞두고 리콴유가 미국에 "중국이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우려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주기를 원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베트남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장악하고 소련과 연합해 중국을 압박하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중국이 1979년 2월 베트남을 공격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리콴유는 중국과 베트남이 충돌할 경우 미국이 최소한 중국을 방해하지 말라는 덩샤오핑의 뜻을 미국에 전했다.

리콴유는 덩샤오핑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대중(對中) 투자를 선도했다. 1993년 문을 연 쑤저우(蘇州) 공단은 중국 노동력과 싱가포르 자본이 결합한 사례다. 이는 1989년 '톈안먼 사태'로 중국에서 철수했던 외국 자본이 돌아오는 계기로 작용했다. 1978년 싱가포르의 대중(對中) 무역액은 전체의 1.8%에 불과했지만 2013년에는 11.8%(914억달러)로 증가해 말레이시아를 제치고 1위가 됐다.

그러나 '중국의 오랜 친구' 리콴유는 중국의 굴기(�起·우뚝 섬)가 싱가포르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하자 미국에 '중국 위협론'을 역설했다. 그는 2013년 워싱턴의 한 공개 강연에서 "미국이 아시아에서 중국의 군사·경제력을 견제하지 않으면 세계 패권국 지위를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며 "중국이 최강국이 되면 다른 아시아 국가는 대적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지역 균형을 위해 반드시 아시아에 개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미국의 '아시아 복귀' 전략을 비판하던 중국에 적잖은 충격을 줬다.

국내 외교가에선 언제부터인가 '미국통(通)' '중국통'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미국에서 잔뼈가 굵은 이른바 '워싱턴 스쿨'은 "동맹국(미국) 가치를 가볍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반면 중국에서 오래 근무한 '베이징 스쿨'은 "미국 일변도 외교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에즈라 보겔은 '큰 외교'를 선보인 리콴유에 대해 "현실주의자였고 조국에 충성을 다 바쳤다. 대세를 보는 장기적 안목이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미국통이냐, 중국통이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