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거든 헐어버리라"던 고(故) 리콴유 전 총리의 집은 싱가포르 옥슬리(Oxley) 거리 38번지다. 24일 가보니 색 바랜 기와부터 보였다. 페인트 찌꺼기가 벽에 붙어 너덜거렸다. 100년 전 유대인 상인이 지었다고 한다. 내버려만 둬도 이윽고 주저앉을 집이었다. 60년 가까이 총리나 국부(國父)로 불렸던 사람은 75년을 이 집에서 살았다.
옥슬리 거리는 서울 강남의 고급 주택가쯤 되는 곳이다. 리콴유 전 총리의 집을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왼쪽의 집은 중국 전통 건축양식으로 기와지붕을 3단으로 올렸다. 갈색 목재와 검은색 금속 틀로 만든 대문이 화려했다. 오른쪽 집은 미국의 단독주택처럼 자동문을 지나면 바로 차고로 통하게끔 되어 있었다. 밝은 색 페인트로 벽을 칠했고, 2~3층에는 통유리를 끼워서 현대적인 느낌을 줬다.
'앤티크'와 '모던' 사이에 끼인 리 전 총리 자택이 지붕만 빼꼼히 보였다. 키 큰 나무들은 흔들리면서 지붕을 가렸다. 유별나게 높은 담장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카드를 맞세운 형태의 지붕 위에 붉은 기와가 덮였고, 하얀 나무판을 드문드문 덧대서 바람이 잘 통하게 했다. 건물 뒤편에서 봤을 때도 3~4m 높이 철제 대문과 경비 초소 말고는 별다른 게 없었다.
싱가포르 부동산업자에 따르면 리 전 총리의 집은 대형 건물 하나만 있는 '싱글 방갈로' 스타일이다. 부동산 관계자는 "크기는 큰 집인데, 요즘 사람들이 '멋있다'고 할 만한 미적 요소는 거의 없다"며 "38번지가 재개발에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부수고 새 건물이 올라갈 것 같다"고 말했다.
생전에 리 전 총리는 이곳을 '침실 5개와 원래는 하인들이 사는 방 3개가 있는 넓기만한 집'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다. 그는 "인도 초대 총리 네루나 영국의 위대한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집도 결국 폐허가 됐다"며 "집이 너무 오래돼 벽이 갈라지는 판이니 없어져도 자식들이 서운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리 전 총리는 1940년부터 이 집에서 살았다.
영국 식민지 시절 이곳에서 청년 리콴유는 인민행동당(PAP) 창립 멤버 등 20명과 독립을 논했다. 싱가포르 독립 이후에는 당론(黨論)이 이 집으로 모였다. 집은 자연스레 싱가포르 정치의 중심이 됐다. 리콴유의 아들이자 현 총리인 리셴룽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뛰놀았다. 2010년 반려자 콰걱추 여사가 사망하자 리 전 총리는 집안 구석구석에 행복했던 순간의 사진을 깔았다. 장례식 이후 여사가 재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오열했다. 이곳에서 노년기의 그는 식사와 운동, 신문 읽기와 공부로 이어지는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 폐렴으로 건강이 악화, 입원하기 전까지 지내던 곳도 바로 '옥슬리 집'이었다.
리 전 총리는 평소 내부에 골프장까지 갖춘 공관(이스타나)을 쓰지 않았다. 대신 옥슬리 거리의 오래된 집으로 퇴근했다. 이 같은 이유로 리 전 총리 재임 당시 집무실 '이스타나'가 공저(公邸)지만, 싱가포르 정부의 진짜 집은 따로 있다는 말까지 나왔었다. 현지 언론에서는 사망 이튿날부터 역사적 의미를 기려야 한다며 "유언을 따르지 말고 집을 보존하자"는 주장이 실렸다.
"내 집을 기념관 같은 국가적 성역(聖域)으로 만들지 말고 헐라"는 리 전 총리 유언의 배경은 '이웃'이었다. 자신의 집이 그대로 남으면 (경호 문제로) 주변 건물을 높이 올릴 수 없어 이웃이 고통받는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 특파원으로 부임한 피터 한남 시드니모닝헤럴드 기자는 리 전 총리의 이웃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적(敵)이 많았던 리콴유의 집 앞으로 시위대가 자주 왔었고, 말년의 콰걱추 여사는 앞뜰에서 바깥을 응시하는 일이 잦았다"고 회상했다.
옥슬리 거리는 양옆으로 차량 출입 통제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정문 방향을 지키는 경호는 모두 4명으로 모자를 쓴 2명이 대문을 지켰고 나머지 2명은 집에서 10~15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출입하는 차량을 감시했다. 사진을 찍으면 즉각 제지를 당한다. 이날 오전 9시 40분쯤 주변을 맴돌던 바바라 옹(55)씨가 "도대체 리콴유 총리의 집이 어디냐?"고 묻자 경호원이 "바로 여기"라고 대답했다. 근처 전봇대 아래에 놓인 꽃다발들이 눈에 띄었다.
리 전 총리는 "지배층의 영혼을 정화하라"는 플라톤의 말을 신봉했다. 1959년 총리 취임 사진을 보면 리콴유와 각료 전원이 정장 대신 흰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다. 청렴과 정직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그는 이후 56년간 청렴 문제만큼은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총리 아들'을 둔 리콴유의 아버지는 일흔이 넘도록 작은 시계 수리점을 운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