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이 서울 한복판에서 정면 충돌했다. 21일 한·중·일 3국 외교장관 회의 직전에 열린 중·일 외교장관 회담에선 '과거사' 이슈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양국 간에 격론이 벌어지고, 공동 발표문에 포함할 문구를 놓고 의견이 충돌하면서,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는 예정보다 1시간 이상 늦게 시작했다.
중국과 일본은 이날 회의 후 시각도 온도도 전혀 다른 각자의 입장을 내놨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공동기자회견에서 "'정시역사(正視歷史·역사를 똑바로 보다)' '개벽미래(開闢未來·미래를 연다)' 여덟 글자가 발표문에 들어간 것이 이번 회담의 최대 성과"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시역사'는 일본이 과거 침략 사실과 식민 통치를 부정할 수 없고, 마땅히 져야 할 역사적 책임을 회피할 수 없으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멋대로 거꾸로 돌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 했다. "'개벽미래'는 '정시역사'의 기초 위에 상호 신뢰를 쌓고, 민간 차원의 이해를 증진하며, 공동 이익을 확대하자는 뜻"이라고 했다. 왕 부장은 "일본이 어떤 태도로 과거 '침략전쟁'을 다루느냐는 중·일관계의 기초는 물론, 이웃국들과의 관계에 직접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다고 중국 외교부는 전했다.
반면 일본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상은 기자회견에서 과거사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일본 외무성 관계자들이 자국 기자들에게 "(3국 회담은 물론 앞서 열린 중·일 회담에서도) 회담 시간 절반 정도가 역사 문제에 할애됐다"며 "중국이 마음먹고 온 것 같은데, 일본도 일본의 입장을 제대로 이야기했다"고 설명했다.
"중국이 9월 항일 전쟁 승리 기념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을 초청한 것은 '일본을 흔들려는 수(手)'"라고도 했다. 일본 외무성은 회담 후 배포한 보도자료에서도 '세 나라 외무장관이 방재(防災), 환경, 청소년 교류, 테러 대책, 원전, 북핵 문제 등에 대해 논의했다'는 내용을 나열한 뒤 맨 끝에 기타 항목으로 '역사 문제에 대해서도 발언이 있었다'고 딱 두 줄 언급했다. '역사를 직시한다'는 부분은 뺐다.
양국 언론과 인터넷에서도 공방이 벌어졌다. 중국 언론은 '정시역사, 개벽미래'에 초점을 맞추면서, '3국 정상회담 조기 개최 노력' 부분에는 비중을 두지 않았다.
관영 신화통신은 왕 부장이 "올해는 항일 전쟁 승전 70주년이며, 일본 입장에선 (역사를 속죄할) 시험대이자 기회"라고 말한 대목을 부각했다. 베이징 외교 관계자들은 "중국은 이번 회담을 통해 중국이 그동안 과거사를 부정해온 일본을 쳤다고 자평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중국 측이 명분과 성과를 강조한다면, 일본은 냉정하게 실익을 따지는 분위기였다. 요미우리신문은 22일 "어차피 중국이 항일 기념행사를 여는 9월까지는 관계가 호전될 가능성이 낮은 만큼, 일본의 입장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주력하겠다는 것이 일본의 방침"이라고 했다. 무라타 고지 도지샤대 학장은 요미우리 인터뷰에서 "국제사회에서 '한·중이 역사 인식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이미지가 확대되면 한·중도 아프다"고 했다. 아사히는 "이번 회담은 관계 복원을 위한 길이 어렵다는 것을 거듭 보여줬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