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시대의 은빛 가발을 쓴 작곡가 바흐 앞에 한 사내가 나타나 묻는다. "제가 당신의 음악을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순간 막이 다시 열리고, 오케스트라 대형으로 무대를 채운 남녀 무용수 18명이 바흐의 지휘에 따라 칸타타 '부수어라, 무덤을 파괴하라'를 온몸으로 연주해낸다. 무용수 한 명 한 명이 악기로, 때론 악보의 음표로 분해되어 바흐가 작곡한 음악을 몸짓으로 빚어내는 것. 귀가 아닌 눈으로 '듣는' 바흐의 시작이다.
지난 19~22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유니버설발레단(단장 문훈숙)이 풀어낸 모던 발레 '멀티플리시티'는 1999년 스페인 출신 안무가 나초 두아토(58)가 오르간 연주자이자 바로크 시대 음악가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의 삶과 예술에 영향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음악가로서 승승장구하던 시절의 바흐, 만년의 공허로 휘청대는 늙은 바흐를 가운데 두고 펼쳐진 희로애락을 무게 있게 밟아나갔다.
수직으로 곧추서는 고전발레의 선(線)과 사방팔방 뻗어나가는 현대무용의 자유로운 움직임이 절묘하게 섞였다. 1부에서 무반주 첼로 모음곡 '프렐류드'를 따라 바흐가 첼로를 상징하는 여자 무용수를 품에 안고 활로 그녀의 몸을 그어대는 춤이 인상적이었다. 음악적 영감이 샘솟는 바흐, 그 영감에 맞춰 바흐 앞으로 쏟아졌다 뒤로 튕겨나가는 발레리나의 몸 동작이 농염했다. 남자 무용수 두 명이 펜싱을 하는 것처럼 활로 상대방을 밀었다가 당기는 동작에선 두 대의 바이올린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고스란히 들리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물 흐르듯 흘러가는 몸의 '흐름'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인간 바흐는 물리적 시간 앞에 힘 없이 스러지지만 그가 남긴 음악은 흐르고 흘러 영원에 닿음을 암시하므로. 남자들의 춤은 강렬하게 치고 나가 힘이 넘쳤고, 여자들은 바흐의 고뇌를 촘촘하게 그려냈다.
절정은 2부에 있다.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열 살 때 아버지를 잃어 고아가 된 바흐는 첫 부인과도 사별해 재혼했다. 두 명의 부인으로부터 낳은 스무 명의 아이들 중 열 명은 젖먹이 때 잃었다. 그 역시 스멀스멀 파고드는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끝내 눈까지 멀어버린 바흐는 탄식과 눈물과 고통 속에 자신을 신에게 맡기고 힘 없이 드러눕지만 음악을 향한 열정만큼은 포기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 악보의 오선지를 본뜬 무대 뒤 대형 철골 구조물 속으로 음표를 상징하는 남녀 무용수 17명이 파고 들어간다. 무용수들이 음표가 되어 몸으로 연주하는 건 서막에도 나왔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 그러면서 그들은 다시 한 번 묻는다. "제가 감히 당신의 음악을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거장(巨匠)에게 고개 숙이는 천재 안무가의 겸손이 배어 나오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