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되살아난 '일본 만화 海賊질'

입력 2015.03.2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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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섭 국제부 기자

일본의 대중문화 히트작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만화 '원피스(One Piece)'다. 1997년부터 연재되고 있는 이 만화는 '원피스'라는 미지의 보물을 찾는 착한 해적들의 모험을 그린다. TV·극장판·문구 등 원 소스 멀티 유즈(OSMU·하나의 콘텐츠로 여러 사업을 벌이는 것)로도 대성공했다. 전 세계 30여국에 수출됐고, 한국에서도 일찌감치 지상파·케이블 채널을 탔다. 국내에 '원피스'가 없는 만화방·대여점이 없다고 할 정도다.

이 '원피스'의 인기를 보여주는 소식이 최근 잇따라 들려왔다. 지난 13일 일본의 명소 도쿄타워에 만화를 주제로 꾸민 '원피스 타워'가 문을 열어 관객이 몰려들었다. 만화 배경을 재현한 분위기 속에 놀이시설·게임·레스토랑 등을 갖췄고, 외국 팬들의 인기를 반영하듯 홈페이지는 한국어·중국어·영어로도 제작돼 있다. 하루 앞선 12일에는 한국 문화체육관광부가 불법 복제 '원피스 피규어(캐릭터 인형)' 1746개를 압수하고 유통업자를 입건했다. 저작권을 침해한 피규어 불법 복제품이 적발된 첫 사례다.

두 소식은 일본 문화 개방과 한류 붐 직전까지 '무시'와 '열등감'이라는 이중 잣대 속에 뒤틀려 있던 한국의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1998년 첫 개방 전까지 일본의 영화·음악 등 대중문화 개방을 공론하는 것은 사회적 금기였다. 식민지 피해국으로서의 거리감, 외설스럽다는 선입견, 국내 문화계를 점령할 것이라는 불안감 등이 뭉뚱그려진 두려움은 막연하지만 강력했다.

그 두려움이 걸어잠근 빗장 속에 일본 대중문화를 대하는 내부 시선은 기이하게 뒤틀렸다. 대표적인 게 만화·애니메이션이었다. 1970~90년대 지상파 방송사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이름을 한국식으로 바꾸고, 일본 글자를 지우는 식으로 '국산'으로 둔갑시켰다. 만화가게나 문방구에는 정체 불명의 한국인을 작가로 앞세운 해적판 일본 만화가 쏟아졌다.

다른 분야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일본 영화·드라마·음악 등이 밀수나 해적판 등으로 은밀히 소비되는 동안 TV·라디오 방송에서는 '일본 것을 베꼈다'는 의혹이 짙은 방송 프로와 가요가 등장했다. 하지만 미디어의 발달과 일본 문화 개방으로 문화 소비자들의 눈이 날카로워지면서 무작정 베끼기 관행은 사그라들었고 이는 콘텐츠 자생력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한류 드라마와 K팝 가수들의 일본 내 활약은 눈부셨고, 3D 애니메이션과 웹툰 등에선 일본을 앞서갔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일본 만화 불법 복제품이 한국에서 팔린다는 소식은 일본과 맞선 한국 대중문화의 모습을 다시 기형적인 과거로 되돌릴 수 있는 악재다. "더 많은 일본 만화 해적 상품이 있다는 정보가 있다"는 문체부 관계자의 귀띔은 당혹스러움을 넘어 자괴감을 안겨준다. 한·일 수교 50주년을 맞아 "일본은 과거사를 직시하라"는 요구가 국내에서 쏟아지는 시점에서 우리는 과연 일본에 대해 떳떳할까. 일본 우익들의 '혐한(嫌韓) 놀음' 소재가 추가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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