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은 절정이었다. 다리는 이미 접는 것 자체가 힘들었고 마음속에서 화두(話頭)는 사라지는 듯했다. 독기(毒氣)로 앉아 있는 것 같다. 근데 옆의 도반(道伴) 스님 한 분은 용맹정진(勇猛精進)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허리 꼿꼿이 세우고 잠도 잘 안 잔다."

최근 내밀한 선방(禪房) 풍경을 엿볼 기회가 생겼다. 해인사가 발행하는 월간 '해인'에 한 해인사 승가대학 학인(사미)이 '동안거의 용맹정진'을 기고한 것. 하안거·동안거 석 달 수행의 마지막 1주일간 잠을 자지 않고 참선 수행에 몰두하는 해인사의 용맹정진은 유명하다.

용맹정진 기간, 침묵의 역할은 크다. 오로지 화두 하나에만 집중, 또 집중한다. 좌복(방석)에 앉아서도, 걸을 때도 침묵 속 화두뿐이다. 기본 의사 소통은 '죽비'가 맡는다. 대나무 가운데를 길이 방향으로 가르거나, 두 쪽을 묶은 죽비는 손바닥에 대고 치면 '짝, 짝' 날카로운 소리가 난다. 이걸 세 번 치는 것으로 정진 시작과 끝을 알린다. 용맹정진 기간엔 새벽·저녁 예불도 죽비 세 번으로 대체한다.

천주교 수도 생활에서도 침묵은 영성을 키우는 중요한 도구다. 수도원들은 매일 '대침묵' 시간을 지키고, 특히 봉쇄수도원은 침묵이 일상이다. 2009년 국내 개봉된 다큐 영화 '위대한 침묵'은 침묵 속에 살아가는 알프스 산중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생활을 2시간 반 동안 대사 한마디 없는 영상에 담았지만 10만명이 관람했다. 20세기 영성가 토머스 머튼(1915~1968)이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영성(靈性)을 기록한 저서 '영적 일기'(바오로딸)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수사신부들과 평수사들이 수위실 앞에 어우러져 수화(手話)로 작별 인사를 하며…." 말 대신 수화로 소통하는 이런 침묵의 순간에 머튼은 오감(五感)을 활짝 열고 풀벌레·염소·새끼 양의 울음 소리와 바람·온도 변화 등 자연현상까지도 묵상의 소재로 삼는다.

법정 스님의 5주기 다음 날인 17일 아침 찾은 서울 성북동 길상사는 새들만 수다 떨고 있을 뿐, 적막하고 정갈했다. 전날 추모 행사 때 조화(弔花) 몇 개가 놓인 설법전 앞을 지나자 담벼락 아래에 작은 글판이 놓여 있었다. "우리들은 말을 안 해서 후회되는 일보다도 말을 해 버렸기 때문에 후회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늘 "내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고, 나머지는 저 꽃들에게 들으라"고 법문을 마무리했던 법정 스님이다. 글귀를 읽고 돌아서니 노란 꽃 몇 송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곁에서 비질하던 처사가 "영춘화(迎春花)입니다. 봄을 반기는 꽃"이라 했다.